[오늘과 내일/서영아]‘이혼하거나, 이민 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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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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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을 중심으로 상속세 관련 논쟁이 한창이다. 표심을 밀고 당기는 논쟁들을 지켜보며 드는 아쉬움은 한국 상속세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통찰이 없다는 점이다.

상속세는 닥쳐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고, 당사자들은 고통이 큰 세금이다. 특히 기업을 일군 연로한 사업가들의 시름이 깊다. 피와 땀을 갈아 넣은 회사 절반을 세금으로 바쳐야 하니 잘나가던 회사를 매각하거나 폐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게임회사 넥슨은 창업주 김정주 회장이 사망하자 상속세를 주식으로 물납해 정부가 2대 주주가 돼 버렸다.

세제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점도 많다. 예컨대 부부간 경제공동체를 인정하지 않는 배우자 공제, 38년간 물가 상승을 반영하지 않은 공제액 등이 그러하다.

가장 큰 문제는 징벌적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 누군가가 애써 일군 자산에 대한 존중이나 망자에 대한 예의, 상속인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납세자 입장에서 효용성을 느끼기 어렵고 억울하기만 하다.

본질 빠진 상속세 논쟁

일제강점기에 처음 도입된 상속세는 몇 번 변천을 겪은 끝에 1997년 개정판이 유지되고 있다. 당시 설정된 일괄공제 5억 원은 서울에서 30평대 아파트 3채 정도는 살 수 있는 돈이었다. 1997년 30평대 아파트 시세표를 보면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1.52억 원, 잠실 주공5단지가 1.35억 원, 노원구 하계동 미성아파트가 1.4억 원이었다. 당시 법 입안자들은 이 정도 액수는 망자가 가족에게 남겨줘도 괜찮은 자산이라고 봤던 거다. 이후 집값은 10배 이상 상승했지만 일괄공제액 5억 원은 변함이 없다.

정치권에선 배우자 공제를 현행 5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올려준다고 선심 쓰듯 말하지만 이상한 얘기다. 한 가정의 자산은 부부가 공동으로 쌓은 것이고 부부는 경제공동체다. 이혼 시 재산 분할에 증여세가 붙지 않고, 1가구 1주택 규제에서도 부부를 한 몸으로 간주하는 이유다. 유독 상속과 증여에서만 부부는 딴 몸이 된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상속이 일어나기 전 이혼을 하는 게 현명하다는 말이 나온다.

이혼하면 비과세, 상속하면 세금 폭탄 배우자 공제 문제가 얼마나 큰지 일본 사례를 보면 실감한다. 일본에서는 배우자의 법정상속분은 무조건 전체 상속액의 절반이다. 액수가 얼마건 세금이 붙지 않는다. 1000억 원을 상속하면 배우자에게 돌아가는 500억 원에는 세금이 없다는 얘기다. 또 망자가 사용하던 주택과 건물의 경우 주택은 330㎡까지, 건물은 400㎡까지는 산정가의 80%를 공제해준다. 남은 배우자의 노후 생계와 주거를 보장하고 망자의 생전 자산을 존중한다는 배려가 읽힌다. 가업을 승계하는 경우에도 상속 증여세는 매각 혹은 폐업 시까지 납부 유예된다. 상속세를 거론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한국 상속세는 일본에 이어 가장 높다’는 말의 실상이 이렇다.

‘인간의 얼굴을 한 세금’이 쉬운 얘기는 아닐 것이다. 다만 징벌적 상속세가 부자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건 분명하다. 200억 원까지는 상속세가 없는 미국을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갈 곳은 널려 있다. 굳이 좁은 땅덩이에 갇혀 부자를 죄악시하는 국세청의 볼모로 살 일이 있겠나.

2023년 사망자의 6.8%가 상속세를 냈다고 한다. 혹자는 상속세가 아직도 극히 일부의 세금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을 이용한다. 하지만 한국 인구 20%가 65세 이상이다. 이들 모두가 상속을 걱정하고 준비하는 후보군이다. 평생 일군 자산을 지키려면 이민이나 이혼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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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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