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승련]계엄이 끄집어낸 ‘앗 뜨거’ 순간

1 month ago 6

김승련 논설위원

김승련 논설위원
영화 ‘도둑들’에서 배우 오달수는 홍콩인 행세를 했지만, 이내 실체가 드러난다. 미심쩍은 누군가가 뜨거운 차를 얼굴에 부었더니 “앗 뜨거 뜨거…” 하며 우리말로 소리쳤다. 위기가 닥치거나, 뭔가에 쫓기거나, 감당하기 힘든 큰일이 벌어지면 내 안의 알맹이가 무심결에 튀어나온다. 이번 계엄·탄핵 국면에서도 비슷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민주당 핵심부가 갖는 강대국과 국제질서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 버렸다.

대통령답지 못한 尹의 반중 의식

가장 눈에 띈 건 윤 대통령의 반중국 가치였다. 탄핵소추 직전 대국민담화를 통해 미군 항공모함과 국가정보원을 드론으로 촬영한 중국인을 굳이 거론해 중국을 겨냥했다. 또 체포 직전에는 친필 메모를 통해 ‘권위주의 독재국가가 국내 정치세력과 손잡는다’며 중국을 연상하게 했다. 헌법재판소 법정에서 법률대리인들이 끝도 없이 중국의 선거 전산망 침투 가능성을 주장했는데, 옆자리의 대통령 생각이 그럴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납득할 만한 증거도 없이 중국이란 거대하고도 복잡미묘한 상대국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우를 범했다. 평소라면 참모들이 말렸겠지만, 그런 보좌가 없는 지금 대통령 생각은 한중 관계의 먼 미래가 아닌 자기 탄핵과 재판에만 머문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은 중국 거부감을 대놓고 말한 어쩌면 유일한 대통령이다. 후보 땐 “우리 청년들이 중국을 안 좋아한다”고 했고, 재임 중엔 대만 문제로 중국을 자극했다. 비외교적 언사였고, 그 말을 왜 했어야 하는지 전략이 안 보였다.

민주당의 탄핵소추문은 또 어떤가. 지난해 12·3 계엄 직후 국회의 1차 탄핵 표결이 7일에 있었다. 민주당이 소추문을 작성했는데, 결론 부분에 “북중러를 적대시했고, 일본 중심의 기이(奇異)한 외교를 했다”고 썼다. 한미일 협력을 추진한 미국의 반발을 부를 내용이었다. 민주당은 시간에 쫓긴 실수였다면서 그 대목은 조국혁신당이 썼다고 책임을 돌렸다. 하지만 정청래 법사위원장, 김용민 의원 등이 관여했다는 그 글은 당 주류의 집단적 속마음이 ‘뜨거 뜨거’ 순간을 맞았던 것 아닐까. 생방송 즉흥 발언도 아니고, 역사적 기록물인 탄핵소추문을 가볍게 다뤘을 리 없다. 192명 야당 의원 중 왜 이의 제기가 없었는지 궁금하다.

192명 중 누구도 문제를 못 느꼈나

미국은 반발했고, 중국은 반색했다. 중국 관영매체인 ‘참고소식(參考消息)’은 “구중친일(仇中親日·중국을 미워하고 일본을 가까이하다)이 소추 이유였다”고 보도했다. 일주일 뒤 2차 탄핵 때는 그 대목을 삭제했지만, 한국계 미 하원의원이 비판 기고문을 미국에서 쓰기 전부터 워싱턴 조야의 우려가 민주당에 전달됐다. 느닷없는 한미동맹 강화 결의문 발의, 노벨평화상에 트럼프 추천, 이재명 대표의 한미일 협력 평가는 이런 국면에서 나온 것이다. 진보당 소속 반미운동가 3명을 비례대표 상위권에 공천하고, 한미일 군사훈련을 두고 “자위대의 군홧발”을 거론하던 그 민주당이 맞나 싶다.

혹여 조기 대선 국면이 오면, 여야는 다양한 홍보전에 나설 것이다. 국민의힘은 ‘반중국 정서’를 놓고 반중 친윤 시위대와 중도층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할 수 있다. 민주당 역시 이미 시작한 트럼프 띄우기, 한미일 협력 강조를 통해 상대적으로 친중적이란 이미지 탈피를 시도할 거다. 선거 캠페인은 구호와 약속의 형식으로 당과 후보 브랜드를 바꾸고, 색칠하고, 때론 감추는 일이다. 하지만 다음 대선 때 외교안보 영역에선 이 작업이 더 어려워졌다. 툭 튀어나온 진심을 읽어버린 유권자들이 쉽게 믿지 않을 것이고, 중국 미국 일본 정부도 다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쯤은 비밀도 아니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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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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