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형석 칼럼] '은둔 경영'으론 빅테크 대항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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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석 칼럼] '운둔 경영'으론 빅테크 대항 못한다

‘은둔의 경영자’는 국내 대기업 창업 최고경영자(CEO)를 설명하는 단골 수식어다. 공식적인 자리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얘기다. 특히 정보기술(IT) 분야에 이런 평가를 받는 인물이 많다. 네이버(창업자 이해진)와 카카오(김범수) 같은 인터넷 기업 대부분이 전문경영인을 앞세운다. 엔씨소프트(김택진), 스마일게이트(권혁빈) 같은 디지털 콘텐츠 기업도 창업자가 대중 앞에 나서길 꺼린다.

글로벌 빅테크 창업 CEO들은 딴판이다. 미디어 노출을 오히려 즐긴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엔비디아의 젠슨 황, 오픈AI의 샘 올트먼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주주총회나 신제품 발표회 외에도 수시로 자리를 만들어 투자자나 대중과 소통한다. 사진을 같이 찍고 사인도 해준다. 팬 서비스 수준이 연예인과 정치인 저리 가라다. 그것도 부족해 매일 SNS로 자신의 의견을 실어 나른다.

창업 CEO의 말과 행동엔 힘이 있다. 회사를 설립하고, 경쟁자들과 싸우며 특정 분야의 정점에 오른 역사가 아우라가 돼 주기 때문이다. 창업자 효과는 자금을 조달하거나 인재를 수혈할 때 드러난다. 투자와 취업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창업자가 진정성을 내세우면 절반쯤은 먹고 들어가기 마련이다.

국내 창업 CEO라고 이런 생리를 모르는 게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은둔 이유를 ‘모난 돌이 정을 맞는’ 한국 특유의 정서 때문으로 설명한다. 소신 발언을 하던 인물도 국정감사에 불려 나가 혼쭐이 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규제당국도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자칫 ‘괘씸죄’에 걸리면 감내해야 할 유무형의 불이익이 상당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의 은둔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세간의 압박이 싫으면 회사를 떠나 연쇄 창업자의 길로 가면 된다. 대주주로 배당을 받으며 새로운 기업을 세우면 곤욕을 치를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 창업 CEO 대부분은 전문경영인을 앞세우고 ‘수렴청정 경영’을 하는 길을 택한다. 기업 경영은 하고 싶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화살’은 맞고 싶지 않다는 게 이들의 속내다.

최근엔 창업 CEO들이 세상으로 나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세계 각국은 AI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미국은 일본과 손잡고 700조원을 투입해 인공지능(AI) 인프라를 구축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의 수출 규제로 AI 학습용 장비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빅테크와 맞먹는 수준의 AI 플랫폼 ‘딥시크’를 내놓는 저력을 보였다.

이런 격변의 시기엔 창업 CEO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술 개발 로드맵의 기조를 바꾸고,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는 등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내려야 한다. 전문경영인도 미래 전략을 만들 수 있겠지만 큰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창업자와 이사회 등 눈치를 봐야 할 곳이 많고, 자기 임기를 넘어선 장기 로드맵을 꾸릴 만한 유인도 작기 때문이다.

은둔의 경영자 중 한 명인 이해진 네이버 GIO(글로벌투자책임자)가 8년 만에 이사회 의장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네이버 경영에 참여하겠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네이버는 대규모언어모델(LLM)로 빅테크와 경쟁하는 거의 유일한 국내 기업이다. 네이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한국의 AI 주권이 흔들릴 수 있다. 딥시크의 등장으로 글로벌 미래기술 전쟁의 양상이 춘추전국시대처럼 바뀌었다. 많은 은둔의 경영자가 양지로 나와 한국 산업 발전에 힘을 보탰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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