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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6일 아침 인천 서구의 한 대학병원 장례식장. 부모가 생계와 치료를 위해 집을 비운 사이 발생한 화재로 목숨을 잃은 열 두살 초등학생의 발인이 있었다. 수의사가 꿈이었다는 아이는 고양이를 꼭 끌어안은 밝은 모습의 영정 사진과 함께 마지막 길을 떠났다. 각박한 세상에 꿈조차 펼칠 수 없었지만 아이는 되레 세상에 고귀한 선물을 남겼다.
지난달 26일 불이 난 그때 혼자 집에 있었다. 아버지는 1주일에 3차례 신장 투석을 하는데 그날도 병원에 갔고, 어머니는 식당 일을 하러 간 사이에 불이 났다. 아이는 중상을 입고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닷새 만에 숨을 거뒀다. 아버지는 신장 투석을 해오던 중 다니던 직장도 잃었다고 한다. 홀로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집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가정은 지난해 5차례나 정부의 복지 사각지대 발굴시스템에 위기 징후가 포착됐으나 매번 부모 소득이 기준을 넘은 탓에 지원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아이는 치료 중 뇌사 판정을 받았고 부모는 힘든 결정을 했다. 심장과 췌장 등 장기 4개를 기증하기로 했다. 먼저 기증 의사를 밝힌 건 아니지만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기증에 동의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언론 인터뷰에서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이 장기기증이란 것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좋은 취지여서) 동의했다"면서 "딸이 수의사를 꿈꿨는데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을 하고 떠난 착한 아이로 기억되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는 지난 3일 4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면서 지역사회 등에서 온정의 손길이 잇따랐다. 도움을 준 이들은 "부모님의 마음을 살펴 드리고 싶다"며 먹고 사느라 천금 같은 자식을 지키지 못한 부모를 위로하는 따뜻함도 잊지 않았다. 발인이 있기 전날까지 900만원에 가까운 성금이 모였다고 한다. 행정기관과 교육청 공무원들도 성금을 보탰다. 당국도 뒤늦게 나섰다. 관할구청은 아이 유족에게 3개월 치 긴급 생활비를 지급했고 한국토지주택공사도 임대주택을 3개월 동안 제공하기로 했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복지 사각지대'가 도마 위에 오른다. 아직도 복지는 빈곤했고 행정은 소극적이었다. 비상계엄과 탄핵소추, 개헌 같은 거대 담론에 가려져 있었을 뿐 여전히 혼자 힘으로는 지탱하기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산과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하지만 일선 공무원들의 세심한 발길 하나하나가 그들에겐 삶을 지탱하는 끈이 될 수 있었다. 국가의 손길은 느리지만 이웃의 슬픔에 눈감지 않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이들은 여전히 많았다. '좋은 일 하고 떠난 착한 아이'는 우리 사회에 많은 깨달음과 숙제를 줬다.
bondong@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3월06일 17시00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