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의 최대 적[이은화의 미술시간]〈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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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질의 남자가 힘겹게 연자방아를 돌리고 있다. 거의 알몸 상태인 남자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다. 방아 위에 앉은 남자는 긴 나무 꼬챙이로 벌거벗은 남자의 어깨를 쿡쿡 찌르고 있다. 문간에 선 남자들이 이 모습을 보며 웃고 있다. 도대체 남자는 누구이기에 저런 조롱을 견디며 고된 노동을 하고 있는 걸까.

19세기 덴마크 미술 거장 카를 블로흐가 그린 ‘삼손과 블레셋인’(1863년·사진)은 성경에 나오는 삼손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덴마크 시골의 일상을 주로 그리던 블로흐는 1859년부터 7년간 이탈리아에 머물며 역사화 장르를 발전시켰는데, 이 그림 역시 이탈리아에서 그렸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전사이자 판관이다.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힘을 과용했다. 길에서 만난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 죽이고, 화를 다스리지 못해 무고한 블레셋(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거나 농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또 자신을 공격하는 블레셋 병력 1000명을 살해했다. 그러다 블레셋 여자 델릴라에게 빠져 그만 힘의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델릴라는 삼손이 잠든 사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를 밀고했다. 힘이 빠진 삼손은 블레셋군에 체포돼 두 눈이 뽑힌 후 연자방아를 돌리는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화가는 바로 이 장면을 포착했다. 극적인 빛과 어둠의 대비를 활용해 삼손의 고통과 절망을 강조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삼손의 얼굴과 조롱하는 블레셋인들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삼손은 초인적인 힘을 신에게 받았지만 그 힘을 현명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삼손이 회개하면서 반전이 일어나지만 화가가 주목한 건 그가 적에게 붙잡혀 조롱받는 장면이다. 자신의 교만과 오만함으로 힘을 잃고 조롱과 모욕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삼손의 최대 적은 블레셋인도, 델릴라도 아닌 자신의 입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밀을 발설한 그 입 때문에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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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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