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묵인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이 미국 주도로 통과된 것은 외교에서 ‘영원한 우방은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일깨운다. 지난 24일 유엔 총회에서는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여기에 미국은 러시아와 그 동맹국, 북한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뜻이 좌절된 미국은 총회 후 회원국이 15곳인 안보리에 러시아의 침공 사실은 빼고 신속한 분쟁 종결을 촉구하는 내용의 다른 결의안을 제안해 통과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우크라이나의 주권·독립·영토 보전을 약속하는 문구를 넣으려 했지만, 관철하지 못하자 기권했다. 결국 이 두 결의안 통과 과정을 통해 미국이 북한 중국 러시아와 손을 잡은 셈이 됐다. 그간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북한 핵·미사일 문제 등 주요 현안에서 미국·영국·프랑스 대 러시아·중국 대결 구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번엔 자유 진영 분열상이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2차 대전 후 80년간 자유 진영이 전체주의에 맞서 지켜 온 안보 질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에 허물어진 것이다.
한국이 안보리에서 미국 편을 들어 찬성표를 던진 것은 우크라이나 복구 사업 참여 등을 위한 고육책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국제 규범 파괴가 한반도에도 적용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트럼프 1기 집권 때 ‘리얼리티 쇼’로 혹평받은 세 차례의 미·북 정상회담은 결과적으로 북핵·미사일 고도화를 초래했다. 트럼프는 2기 집권 초부터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지칭하고, 김정은에게 잇달아 회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패싱하고 김정은과 북핵 협상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럽은 미국의 안보에 의존할 수 없다고 보고 핵보유국인 영국·프랑스와 핵 공유를 논의하고, 공동 국방기금 조성을 검토하는 등 자강(自强)에 나서고 있다. 우리도 정권에 따라 급변하는 미국의 억제 전략에만 매달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