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 의대 증원 규모를 최대 2000명 이내에서 각 대학이 자율 결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대학이 소속 의대와 협의해 결정하면 ‘증원 0명’도 수용하겠다는 파격적 양보안이다. 의대협회·의학전문대학원협회는 즉각 대학총장들에게 ‘0명 증원안’ 수립을 요구하고 나섰다고 한다.
의정 갈등이 시작된 지 꼭 1년 만에 해결 실마리를 찾은 듯하지만 씁쓸한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정부가 합리적인 의료인력 수급계획 수립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자율이라는 미명 아래 대학으로 떠넘긴 격이어서다. 자칫 전선이 대학본부와 의과대학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적잖다.
정부로선 의료시스템의 시급한 정상화를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3월 말까지 내년 정원을 확정해야 하는 입시 일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매년 2000명 증원 필요’에서 ‘0명 증원 수용’으로의 돌변은 허탈하다. 극심한 직역 이기주의에 원칙 대응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다가 맞이한 어처구니없는 결과다.
지난 1년간 국민은 의료계가 얼마나 그들만의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절감했다. 역대 정부와 국민의 노력과 참여로 일군 우수한 의료체계를 의사들은 자신들의 업적이라며 공치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제로베이스에서 협의’ ‘원점 재검토’ 등 끝없는 정부 양보에도 막무가내로 ‘사과’와 ‘정원 감축 또는 동결’을 주장했다.
정부가 의사들을 돈만 아는 집단으로 매도했다는 분노도 공감하기 어렵다. 의료계는 정부의 협의 요청을 무시하다가 2000명 증원안이 나오자 ‘우리 허락을 받지 않았다’며 실력 행사에 돌입했다. 이후 교육부·복지부 수장이 번갈아 가며 수차례 사과하고 유연한 접근을 약속했음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사직 전공의 9220명의 2.2%만이 올 상반기 모집에 지원했다. 의사집단은 국민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한 실력 행사로 결국 당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모양새다. 하지만 정부와의 전쟁에선 이겼을지 몰라도 국민 앞에서는 본인들 기득권만 고집한 패배자라는 멍에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