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돼야 할까요?”
최근 만난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던진 이 질문은 오늘날 기업들이 직면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루아침에 바뀌는 글로벌 정책 기조, 돌발적인 관세 조치, 예측 불가능한 외교 변수까지 기업 경영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잡한 퍼즐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불확실성은 이제 일상이 됐고, ‘지정학적 안일함’은 잠깐의 방심만으로도 기업을 큰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됐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급격한 무역정책 변화는 글로벌 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13일(현지시간) 무역 파트너들의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두루 고려해 이르면 4월 초 맞춤형 ‘상호 관세’를 세계 각국에 부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한국도 상호 관세 부과 대상이 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상호 관세는 각국이 미국 상품에 적용하는 관세율만큼 미국도 상대국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다.
◇‘시계 제로’ 위기의 수출 한국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진 한국은 글로벌 무역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40%를 차지하는 미국과 중국은 한국 경제의 방향을 결정짓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반도체산업의 공급망 재편에서 보듯 미·중 갈등의 파장은 이미 현실이 됐고,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정세 악화, 국내 정치 및 금융시장의 불안정성까지 더해지며 기업 전략 수립은 ‘시계 제로’ 상태에 놓여 있다. 이제 기업들은 과거의 안정적인 성장 공식을 벗어나 보다 기민하고 탄력적인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BCG헨더슨연구소의 글로벌 리더이자 지정학 전문가인 니콜라우스 랑은 과거 하나 혹은 두 개의 초강대국이 주도하던 기존 세계 질서가 여러 권력권이 공존하며 복잡하게 얽히는 ‘다극화된 세계’로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국가 간 경제·기술·군사적 연대가 새롭게 형성되며 지정학적 리스크와 공급망 불안정성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공급망 다변화 전략 필요
이런 격변 속에서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기업을 보면 한국 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보다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A기업은 글로벌 통상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태스크포스(TF) 형태의 에자일 팀을 운영하며 거시 경제와 지정학적 변수를 모니터링하고 대체 시장 발굴 및 제품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글로벌 시장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에 대응하고, 가격 정책 및 투자 전략에서도 보다 유연한 의사결정 체계를 확보하겠다는 의지다.
또 다른 사례로 B기업은 공급망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니어쇼어링(nearshoring)이나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에서, 특정 국가나 업체에 대한 의존도 자체를 줄이는 듀얼 소싱으로 전략을 조정했다.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통해 단일 지역에 의존하는 공급망의 취약성이 명확해졌으며, 공급망 다변화는 위기 대응력 확보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질서에 발 빠르게 적응해야
한국 기업들은 올해 안팎으로 유례가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새해를 맞았다. 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투자를 축소하고 비용 절감에 나서고 있지만, 이는 단기적 대응일 뿐이다. 불확실성이 ‘새로운 일상(new normal)’이 된 상황에서 기업의 시야는 이제 ‘내부’뿐 아니라 ‘외부’를 향해야 하며 유연하면서도 장기적인 관점의 전략과 리스크 관리 체계를 일상의 경영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실제로 주요 기업은 정치·경제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외교적 접점을 확대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미국 시장에 의존도가 높은 다국적 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당시 주요 경제정책 변화를 예측하고,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거나 기부금을 전달하는 등 적극적인 관계 구축에 나섰다. 이는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환경에서 단순한 리스크 회피가 아니라 변화에 기민하게 적응하는 것이 기업 생존의 필수 요소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경영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예측이 아니라 빠른 적응을 통한 ‘대외 확장’이다. 다극화된 세계는 새로운 위협과 함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깨어 있는 기업만이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