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제’ 들어온 유행의 기점, 경성역… 농촌 떠나온 하층민의 관문[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2 weeks ago 3

경인선 통과역으로 초라했던 외형… 경부선 부설에 ‘중앙역’으로 격상
일제 주도로 5000여 평 역사 신축… 찬란한 외관에 조선인들 심기 복잡
커피-박가분 등 서양문물 유입 창구… 도시 하층노동자 삶의 현장이기도

서울역은 본래 ‘남대문정차장’이라는 이름의 통과역으로 건설돼 외관이 초라했다(위쪽 사진). 하지만 1905년 일본이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중앙역으로 자리매김했고 공식 명칭도 ‘경성역’으로 바뀌었다. 이후 중앙역에 걸맞은 역사를 새로 지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 1925년 9월 새롭게 준공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역은 본래 ‘남대문정차장’이라는 이름의 통과역으로 건설돼 외관이 초라했다(위쪽 사진). 하지만 1905년 일본이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중앙역으로 자리매김했고 공식 명칭도 ‘경성역’으로 바뀌었다. 이후 중앙역에 걸맞은 역사를 새로 지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 1925년 9월 새롭게 준공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옛 서울역 ‘경성역’의 명암

1925년 10월 15일 ‘경성역’ 낙성식이 열렸다. 행사에는 ‘관민 유지 4000명이 래집(來集)하였으며 간단히 식을 마친 후 정거장 내부를 관람’하기도 했다. ‘오후 한 시부터는 일반 부민에게 관람을 허락하기로 하였는 바 정각 전부터 관람자가 물결같이 밀려들어 오후 한 시경에는 무려 수만 명에 달하여 역 부근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매일신보, 1925년 10월 15일) 신축한 경성역에 대한 많은 관심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경성역은 현재 ‘문화역284’라는 이름의 문화시설이 된 옛 서울역이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서울의 현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철도의 효시는 1899년 개통한 경인선이다. 철도 부설을 모색하던 조선 정부는 1896년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된 즈음 미국인 무역상 제임스 모스와 ‘경인간철로합동’을 체결했다. 이때 ‘경성정차장’ 자리는 ‘새문(新門)’ 안팎의 어딘가로 결정했다. 새문은 서울 서대문(현 NH농협 본점 부근)을 의미한다. 서양 세력이 자리 잡고 있는 중구 정동 일대, 그리고 환궁할 예정인 경운궁(현 덕수궁)의 배후지인 셈이다. 현재 서울역 자리의 ‘남대문정차장’은 통과역의 하나였다. 남대문정차장은 1905년 일본 측이 주도해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위상이 높아졌다. 러일전쟁 당시 군용철도로 부설한 경부선은 도성 밖 남대문정차장을 종착역으로 했다. 경부선과 연결되지 않으면서 간선철도망에서 소외된 경성정차장은 1919년 폐지됐다. 그 대신 남대문정차장이 명실상부한 ‘중앙역’이 됐다. 1923년에는 공식 명칭도 ‘경성역’으로 바뀌었다. 한반도 철도망 형성의 주체가 대한제국 정부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반영된 변화였다.

경성역은 본래 통과역으로 건설됐기 때문에 외관이 초라했던 듯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한 뒤 일부 증축이 이뤄졌지만 2층 목조 건물에 불과했다. 1911년생인 시인 노천명은 어렸을 때 본 경성역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두컴컴한 목재의 건물이라든지 한구석 매점에 팔려나갈 줄 모르는 돌같이 단단한 알사탕 주머니 이런 초라한 차림새는 또 그 당시 내리고 오르는 손님들에게 무엇 그다지 맞지 않는 모양도 실은 아니었을지 모른다.’(노천명 ‘주주야야 송영의 관문 경성역 일대기’, 조광, 1937년 7월호)

중앙역의 위상에 걸맞은 역사를 새로 지어야 한다는 여론은 점점 커졌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1922년 6월 경성역 신축 공사를 착수했다. 설계자는 당시 도쿄제대 공학부장이었던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1869∼1937)였다. 일본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는 다쓰노 긴고(辰野金吾·1854∼1919)의 수제자로, 당시에는 드물게 유럽 유학을 한 서양 건축의 권위자였다. 일제가 경성역의 외관을 어떻게 구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24년 여름 공사를 마칠 예정이었던 경성역은 그 전해 도쿄를 비롯한 일본 간토(關東)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의 여파로 공사비가 삭감되고 한때 자재 공급도 중단되면서 1925년 9월 30일에야 준공됐다. 설계자 쓰카모토의 스승인 다쓰노가 도쿄역의 설계자였다는 점 때문에 경성역의 모델이 도쿄역이라고 짐작되기도 했으나 실제 경성역과 도쿄역은 외관이 많이 다르다. 오히려 당시 유럽의 기차역 중 스위스 루체른역과 비슷하다. 실제 쓰카모토는 유학 시절 본 역사 중 루체른역이 가장 아름다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공사비 삭감 때문에 처음 설계와는 조금 달라졌다고 하나 모습을 드러낸 신축 경성역의 모습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역사와 세 개의 승강장을 합친 전체 연면적 5000여 평 규모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벽돌조 외관의 장중한 르네상스식 건물을 바라보는 조선인의 시선은 복잡했다.

‘신면목의 경성역은 오인(吾人)의 이목이 새로워진다. 이른바 식민지 수부(首府)의 주역이라고 굉장한 위엄을 토한다. (중략) 2, 3등 대합실, 부인 대합실, 변소, 이발소, 귀빈실, 승객실, 식당, 승강기, 유료 변소 등 실로 장관 아닌 바는 아니다. 내인거객 중 혹은 무서워도 하고, 혹은 감탄도 하고 혹은 미워도 하고 또 어떤 류는 헛수고했다고 속 꿍꿍이도 치겠지?’(개벽 ‘경성은 일년간 얼마나 변했나?’, 1925년 12월호) 외세가 건설한 새로운 중앙역의 찬란한 외관과 시설에 감탄하면서도 뭔가 모를 불편함을 감출 수 없는 심경이 잘 드러난다.

흥미로운 점은 1925년 9월 30일 준공한 경성역에 2주가 지나서야 첫 열차가 들어온 사실이다. 같은 해 준공한 조선신궁 진좌제(鎭坐祭·신사에 신을 모시는 의식)에 모실 신체(神體·신사의 신주)를 실은 열차였다. 10월 10일 도쿄를 출발한 신체는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12일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튿날 부산을 출발한 신체가 경성역에 도착했다.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를 통해 화려하게 신축한 역사에 신궁의 신체(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으로 선정)가 처음 도착한 것은 일본의 신이 조선에 문명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를 담은 잘 짜인 ‘이벤트’였다.

문명은 유행이기도 했다. 경성역은 최신 유행이 유입되는 창구였다. ‘박가분을 한 조각 가지고도 치장을 잘 내던 새댁들은 이 철마가 경성역에 실어다 풀어놓은 불란서제의 박래품 쓰는 법을 배워 오늘은 코-티니 폼피안으로 메익업(메이크업)을 하게’ 되었으며, ‘한산모시나 광당포(廣唐布) 대신에 흐늑흐늑한 레-쓰(lace) 쉬-팬(chiffon) 등을 감고도 어색해 하지 않게 되었다.’(노천명, 앞의 글)

경성역에서 가장 돋보이는 공간으로 꼽혔던 2층 대식당. 한 번에 2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경성역에서 가장 돋보이는 공간으로 꼽혔던 2층 대식당. 한 번에 2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먹거리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경성역 1등 대합실 한곁 티룸에서 잘 끓인 커피를 마셨다. 총총한 가운데 여객들은 그래도 한 잔 커피가 즐거운가 보다. 얼른얼른 마시고 무얼 좀 생각하는 것같이 담벼락도 좀 쳐다보고 하다가 곧 나가버린다.’(이상 ‘날개’) 경성역에서 가장 돋보이는 공간은 단연 2층의 대식당(그릴)이었다. 대리석과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진 대식당은 한 번에 2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고추장찌개를 숟가락으로 떠먹던 분들이 가끔은 식당에 나가 어느 틈에 포크와 나이프로 햄 사라다 먹는 법을 알았다.’(노천명, 앞의 글) 경성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경성역을 이용하는 승객도 증가했다. 1928년 통계를 보면 1년간 승차객은 150만 명 정도였다. 하차객도 130만 명에 이르렀다. 193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당시 경성 인구는 39만240명이었다.(별건곤 ‘각방면 각기관 경성 통계’, 1929년 9월호)

이용객 상당수는 지방에서 경성으로 ‘이촌향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도시 경성의 하층민 사회를 형성했다. 1934년 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주인공 영복은 고향을 떠나 경성역의 수하물 운반원으로 일한다. 영복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도시 하층 노동자의 삶의 현장으로서 경성역의 또 다른 모습을 재현한다. 경성역을 ‘거쳐 가는’ 사람도 많았다. ‘3등 대합실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벤치의 자리를 얻지 못한 남녀노유들은 날바닥에 그냥 앉았다. 객지에서 병이 난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은 홑이불때기를 깔고 그 위에 누워 있다. 시멘트를 바른 땅바닥이 돌과 같이 차가웠다. 그들은 할 수 없이 곱아 오르는 추위를 무릅쓰고 맨땅 위에서 그냥 누워 있었다. 이 많은 승객들은 동북만주로 이사 가는 농민들 같았다.’(이기영 ‘두만강’)

경성역은 조선으로 흘러들어오는 첨단의 문물이 반드시 머무르는 장소였다. 반대로 식민지에서 비참한 삶을 벗어나려는 많은 이가 반드시 통과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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