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언어 코디로 활약…"봉 감독, 사람 능력 발휘하게 하는 법 알아"
"단어 하나에 제작진 회의도…삶의 가능성 확장하는 감독 되는 게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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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통역사 최성재(영어명 샤론 최·32)는 영화 '기생충'(2019)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2020년 2월 봉준호 감독 못지않게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봉 감독과 나란히 선 채 마이크를 나누어 쓰며 그의 수상소감을 완벽하면서도 센스 있는 영어로 전달하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 번도 통역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영화학도라는 독특한 이력도 화제가 됐다. 아르바이트 삼아 '기생충' 행사 통역을 하다가 뛰어난 실력을 입증하며 아카데미 무대에까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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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 Images/AFP=연합뉴스]
그는 봉 감독의 첫 할리우드 영화 '미키 17'에서는 각본 번역가 겸 언어 코디네이터(language coordinator)로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어 시나리오를 영어판으로 바꾸고 현장에선 봉 감독이 배우, 제작진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도록 통역을 맡았다. 연출부 역할도 겸한 그는 촬영이 끝난 이후 후반 작업에도 참여하면서 '미키 17'의 탄생 전 과정을 함께했다.
최근에는 각종 해외 행사에 참석해 봉 감독의 '입'으로 활약 중이다. 상영회 일정으로 미국 뉴욕에 머무르고 있는 최성재를 지난달 27일 화상통신으로 만났다.
"'기생충' 오스카 캠페인이 끝날 때쯤 감독님께서 영어 영화 스태프로 일해볼 의향이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저는 '너무 있다. 제가 원한 게 바로 그거다'라고 했지요, 하하."
최성재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봉 감독에게서 작품 참여 제안을 받았던 당시를 떠올리며 자신을 "엄청난 성덕(성공한 덕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 '마더'(2009) 관련 논문을 쓸 만큼 봉 감독의 열렬한 팬이었다. 봉 감독이 그에게 사인을 건네는 꿈까지 꿨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아주 허름한 월세방에서 영화 책을 읽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꿈에 나온 감독님과 같이 일하고 있다는 게…정말 어마어마한 경험 같아요. 감독님을 한 인간으로 알게 된 이후 너무 좋아하는 동료이자 상사, 선배가 됐다는 것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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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감독이 최성재에게 가장 먼저 맡긴 업무는 원작인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최성재는 매일 25쪽 분량의 원고를 보냈고, 봉 감독은 이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써 2021년 완성했다.
"시나리오를 보고서 '와, 미쳤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어요. 어떻게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SF를 쓰셨을까 감탄했지요.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결국 한 청년이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게 느껴지면서 뭉클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놀라움은 잠깐일 뿐, 두 달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번역에만 매달려야 하는 고된 나날이 이어졌다. 한 번도 시나리오 번역 경험이 없던 그에게 제작비 1억1천800만달러(약 1천700억원)짜리 블록버스터의 번역 책임이 주어진 만큼 부담감도 컸다.
'미키 17'은 얼음 행성 개척에 투입돼 위험한 업무를 수행하다 죽으면 복제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의 이야기로, 봉 감독 표 블랙 코미디가 돋보이는 우주 배경의 SF물이다. 한국어로 쓰인 유머러스한 대사를 영어로 얼마나 잘 살리는지가 영화의 재미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성재는 "영어를 쓰는 원어민 입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한 치의 어색함도 용납이 안 됐다"면서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찾아 놓고 그중에 고르곤 했는데, 어느 날에는 (너무 힘들어서) '감독님 나 이거 못 하겠다'고 한 적도 있다"며 웃었다.
그가 가장 어렵게 번역한 부분은 독재자 마셜(마크 러팔로)이 개척단원들에게 자유로운 성생활을 독려하는 장면이다. 한국어로 '창궐하라'라고 적힌 것을 '인페스트'(infest·들끓다)로 바꿨다.
"맥락상 웅장하면서도 전염병처럼 부정적인 분위기, 아이러니함이 담긴 단어였어요. 영어로 무슨 표현이 있을까 생각하다 '인페스트'를 떠올렸죠. 이 단어를 쓸 것인지를 두고 제작진과 회의까지 열었지요. 또 미키가 '이 찌질아'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영어에 찌질이라는 단어가 없거든요. 결국 '서치 어 리틀 ××'(such a little bxxxx·이런 조그만 ××)라는 속어로 바꿨습니다. 봉 감독님이 최대한 저급한 표현을 원하셨거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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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감독은 섬세한 연출과 시나리오로 '봉테일'(봉준호와 디테일의 합성어)이라고 불리지만, 그렇다고 스태프들의 업무에 과도하게 개입해 지시하는 이른바 '마이크로 매니징' 타입은 아니라고 최성재는 강조했다. 번역본을 실시간으로 보내달라고 하는 대신, 최성재가 번역을 끝내고 완성본을 먼저 보내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봉 감독님은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의 능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지를 잘 아세요. 그게 가장 큰 장점 같아요. 또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아무리 패닉에 빠져도 늘 침착하게 중심을 잡아주셨죠. 훌륭한 감독, 아티스트가 되려면 훌륭한 리더가 돼야 한다는 걸 봉 감독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 역시 영화감독이 되는 게 오랜 꿈이다. LA 근교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한국인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면서도 "오늘 밤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하루를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영화는 그에게 삶의 숨구멍과 같았다고 한다.
"가끔 저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계속해서 좁은 구렁텅이 안에서의 삶만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분명 가능성이 있지만 세상이 저희에게 그 가능성을 못 보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저는 좀 더 삶의 가능성을 확장해주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습니다. 그게 그동안 영화가 저에게 해준 일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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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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