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는 19세기 중상주의 시대의 수법이다. 당시엔 수입품에 관세를 매겨 국내 산업을 무조건 장려해야 국부가 축적된다고 믿었다. 농업·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물린 영국 곡물법이 대표적이다. 유럽은 오랜 논쟁 끝에 곡물법을 폐기하고 자유무역협정(상업협정)을 체결한 뒤 생산성 폭발을 경험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신랄한 중상주의 비판서에 다름아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는 내용 면에서 두 세기 전 중상주의와 크게 다르다. 중국 등 반칙 세력이 존재하기에 정당성도 적잖다. 하지만 물가 상승, 생산 감소 등 여러 부작용은 어쩔 수 없다. 트럼프는 왜 동맹도 이웃국도 무시한 채 관세 전쟁에 올인하는 것일까.
감당하기 어려워진 눈덩이 부채 해결을 위한 야심 찬 새판 짜기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나홀로 호황’을 구가 중인듯 보이지만 미국 경제는 ‘부채 의존 성장’이라는 깊은 속병을 앓고 있다. 1970년부터 55년(1998~2001년만 흑자)째 재정적자에 시달린다. 그 결과 나랏빚이 5경원(약 36조달러)을 돌파했다.
지난해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119%로 OECD 평균(75%)보다 훨씬 높다. 재정적자비율도 6.4%로 2차 세계대전 때와 심각한 경기침체기를 빼면 최고 수준이다. 작년에는 국채이자비용이 처음으로 국방예산을 넘어섰다.
숨넘어가는 진단이 잇따른다. ‘안면몰수하고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자’는 도발적 주장이 대두된 지 오래다. 글로벌 금융위기 예측으로 유명한 레이 달리오는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더 내는 ‘죽음의 소용돌이’를 경고했다. 당장 올 상반기에 최악 상황이 닥칠 수 있다고도 했다. 파월 미국 중앙은행 의장마저 보름 전 의회에 출석해 “연방예산이 지속불가능한 경로에 있다”고 토로했다.
‘빚더미 미국’이라는 앵글로 보면 중구난방 트럼프 정책의 아귀가 들어맞는다. 재정적자 해소 방법은 세수 증대와 지출 감축뿐이다. 세수 증대를 위한 트럼프의 선택이 바로 관세다. 법인세·소득세 추가 인하를 공약했으니 남아 있는 유일한 세수 대량확보 수단이다. 지난주 한 연설에선 “관세 덕분에 재정에 수조달러가 채워질 것”이라고 했다.
결연한 지출 감축 노력은 때로 기행으로 표출된다. 정부효율부 수장 일론 머스크는 엊그제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함께 전기톱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공무원 20만 명 해고 등으로 연방예산 연 1조달러 절감을 선언했다. 냉혈한 이어서가 아니라 불가피해서다.
관세전쟁의 궁극적 목표는 달러패권 사수다. 트럼프는 “탈달러 시 관세 100%를 각오하라”며 브릭스(BRICS)에도 엄포를 놨다. 돈을 찍어 적자를 메우다 어느 순간 임계점에 도달하면 미 국채는 외면받고 달러 제국은 무너진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원조 제국 스페인과 영국의 퇴장이 그랬다.
관세전쟁은 날밤을 새워도 풀기 힘든 난해한 과제다. 하지만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명쾌하다. 장기재정적자는 동북아 변방의 이름 없는 원화에 지옥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 국가채무비율은 47% 선으로 아직 양호하지만 빚 쌓이는 속도는 OECD 최상위권이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재정적자가 385조원으로 이전 5개 정부(김영삼~박근혜) 누적 적자(316조원)를 앞질렀다.
그 결과 단숨에 빚의 악순환 트랙으로 진입했다. 이제 복지·제도를 현상유지만 해도 국가채무비율이 2040년 80%, 2060년 136%로 치솟는다. 암울한 미래가 예고됐는데도 비어가는 국고마저 먼저 털어 생색내겠다는 문재인의 후예가 즐비하다. 30여 년 뒤면 고갈돼 천문학적 빚으로 돌아올 국민연금을 더 빨리 빼먹는 입법에 안달이다.
관세전쟁은 제조업의 중요성도 새삼 일깨운다. 트럼프는 역내 자유무역협정국에 25% 관세 부과를 위협하면서까지 국내 제조기반 재건에 집중하고 있다. 법인세 추가 인하(21%→15%)도 미국 내 생산업체에만 적용하고, 수입품에는 최대 100% 관세를 추진 중이다. 연 1조달러에 육박하는 무역적자 개선 없이는 달러패권도 안보도 없다는 판단이다. 국가대표 기업들을 해외 투기자본의 먹잇감으로 전락시킬 상법 개정에 혈안인 여의도 포퓰리즘과 확연히 대비된다. 재정과 제조업이라는 시대의 키워드를 읽지 못하면 ‘매드맨’ 트럼프는 깨어나기 힘든 악몽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