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칼럼]대표선수, 히든카드 없이 ‘타짜 트럼프’ 상대하는 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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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정상들, 미국에 ‘깜짝 선물’ 공세
대가 불확실해도 경쟁적으로 보따리 풀어
쓸 수 있는 카드 제한된 韓, 상상력 필요
카드보다 더 중요한 건 지도자의 협상력

박중현 논설위원

박중현 논설위원
미국의 관세 폭탄을 조금이라도 비켜가기 위해, 자국 안보에 도움 될 말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각국 정상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앞에 ‘깜짝 선물’을 펼쳐놓고 있다. 옛날 중국, 로마 황제에게 주변국들이 진상품 갖다 바치는 모습을 연상케 해 ‘조공 외교의 부활’이란 푸념이 나온다. 그래도 지도자 개인의 자존심보다 훨씬 중요한 게 국가 전체의 이익이다.

지난달 초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1조 달러(약 1460조 원) 대미 투자’와 도금한 사무라이 투구로 트럼프를 웃게 만들면서 일본산 제품의 관세 면제를 요청했다. 뜯어보면 2023년까지 일본의 대미 누적투자액 8000억 달러에 2000억 달러를 추가한다는 것이어서 숫자가 과대 포장됐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트릴리언(trillion·1조)’이란 단어를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란 의미로 즐겨 쓰는 트럼프의 언어 습관까지 신중히 고려한 노력이 보인다.

중국의 안보위협이 최대 현안인 대만에선 ‘호국신산(護國神山·나라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불리는 파운드리 기업 TSMC가 정부 대신 나섰다. 조 바이든 정부 때 발표된 대미 투자액 650억 달러와 별도로 100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해 미국에 반도체 공장 5곳을 더 짓기로 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여러분은 트럼프 대통령의 힘을 보고 있다”며 추켜올렸고, 트럼프는 “(중국의 대만 침공은) 재앙적 사건이 될 것”이란 말로 화끈하게 보답했다.

우크라이나를 빼고 미국과 직거래 종전 협상에 나선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전쟁으로 일부 파괴된 러시아·독일 간 액화천연가스(LNG)관 노르트스트림 사업권을 선물로 꺼내들었다. 미국이 사업권을 챙기는 대신 유럽연합(EU)에 다시 가스를 팔겠다는 거다. 선물은 꺼내지도 못하고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말다툼을 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자국 희토류 자원을 미국에 넘기는 광물협정에 반강제적으로 서명해야 했다. 별난 선물도 등장했다. 엘살바도르의 부켈레 대통령은 미국에서 체포된 불법 이민자, 범죄자를 악명 높은 자국 교도소에 수용해 트럼프의 골칫거리를 없애주겠다고 제안했다.

한국도 뭐든 카드를 내놓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임박했다. 12일부터 미국은 철강·알루미늄·자동차 부품에 대해 25% 관세를 물린다. 다음 달 2일부터는 환율정책·보조금 등 ‘비관세 장벽’까지 고려한 국가별 맞춤형 상호관세가 예고돼 있다. 최근 의회 연설에서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평균 관세는 미국의 4배”, “반도체지원법은 폐기돼야 한다”는 등 사실과 다르고, 한국 기업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비상계엄·탄핵 사태 때문에 참고 있던 한국행 청구서를 날리기 시작한 거다.

돈을 쓸어 담고 있는 대만 반도체 기업의 막대한 투자, 우크라이나의 광물자원, 러시아 LNG관 사업권 같은 카드가 한국에는 없다. 정부, 경제계에선 조선업 협력, 미국산 천연가스 구매 확대, 한미 원전협력 등을 거론한다. 하나하나 떼어보면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조합하면 트럼프를 놀라게 할 ‘히든카드’로 키울 여지가 적지 않다.

최근 들어본 제일 ‘신박한’ 카드는 중국과의 군함 수 경쟁에서 뒤처져 해군력 확충에 비상이 걸린 미국에 우리 돈을 들여 군함을 매년 몇 척씩 만들어주자는 아이디어다. 이 정도면 방위비 지출 축소, 중국과 해양패권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트럼프가 “내가 돈 한 푼 안 들이고, 미국 해군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었다”며 흥분할 만한 일 아닌가. 한국은 이지스 구축함을 척당 1조 원의 ‘저렴한’ 가격에 건조할 수 있는 자유진영의 유일한 나라다. 경제·안보를 위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지출이라면 미국과 안보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면서, 우리 조선업계에 돈을 투입해 경제에도 보탬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이런 제안이 제대로 먹힌다면 최근 트럼프가 한국과 일본의 참여를 슬쩍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린 사업성이 불투명한 알래스카 천연가스 개발사업 등을 적당히 피할 핑곗거리도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카드를 들고 협상 테이블에 나갈 대표 선수다. 한국은 몇 달 뒤 백악관을 방문해 ‘타짜 트럼프’와 마주 앉을 플레이어가 누군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태다. 아무리 그럴듯한 협상안이 있어도 결국 어떤 카드를 쓸지 선택하고, 대신에 반드시 얻어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을 정하고, 협상 결과가 불러올 정치·사회적 파장까지 책임지는 건 대통령이다. 절대 패배해선 안 되지만 이기더라도 이긴 걸 내색하면 안 되는, 나라의 미래가 걸린 최고 난도의 정치·경제·외교·안보 ‘멀티 게임’이 한국 지도자의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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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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