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인간 존엄이 한일 관계의 초석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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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 일제강점기 피해자 돕는 이들 있어
‘다시는 인간 존엄 훼손 안 된다’ 믿음 때문
韓日 협력, 가해자 반성 촉구만으로는 한계
“가치 함께 추구하자” 선진 우방의 충고를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2008년 12월 22일 동아일보에 서울 대학로의 한 철거 현장에서 여러 구의 인골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실렸다. 이듬해 3월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과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해부용으로 사용된 시신의 유해로 추론된다는 감식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89년 7월 22일 도쿄 신주쿠에 있는 국립감염증연구소 건설 현장에서 100구가 넘는 인골이 발견됐다. 몇 년 뒤, 총상이나 수술 흔적이 남아 있는 인체 표본의 유골이며 그중에는 아시아계 외국인도 있다는 감정 결과가 발표됐다. 인골이 발견된 곳은 과거 육군군의학교가 있었던 자리다. 731부대 등 전시의 의학범죄와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이 일었다.

2005년 도쿄로 이사했을 때, 당신의 출퇴근길에 있는 국립감염증연구소는 무서운 곳이니 밤에는 그 길로 다니지 말라며 농인 듯 겁을 준 일본인 지인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골 뉴스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나 보다. 인골이 발견되고 35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일을 알고 있는 일본인이 별로 없다.

그런데 아직도 일본에는 그 유해가 전쟁범죄의 피해자는 아닌가 하는 의혹을 파헤치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 보조금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의 후원도 거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은 왜 그 일을 놓지 못하는 걸까? 인간 존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시신들이 정말 인간 존엄이 극단적으로 훼손된 범죄의 희생자들이라면 전모를 밝히는 것이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이고, 일본이 다시 그런 일에 연루되는 걸 막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에 와서야 위안부나 정신대 그리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돕는 일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국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는 일이지만 인간 존엄에 대한 믿음으로 그 일을 한다. 일본 생활에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의외로 그들도 우리와 같은 본성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안도할 때도 많다.

진화심리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저서 ‘인간본성’에서 인간 종족은 민족과 종교, 문화가 달라도 본성이 같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해서 유사한 도덕률이 발견된다고 했다. 일본에 살면서 가끔 그 말을 실감한다. 우리의 본성은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여기고, 그래서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를 중대한 범죄로 본다.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은 한국과 일본이 함께 추구하는 가치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 간의 우호를 다지는 데 이 가치가 초석이 될 수 있다. 미중 마찰, 우크라이나 전쟁, 자국 우선주의의 확산 등으로 전 세계가 혼란스럽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한국과 일본 기업은 여러 분야에서 협업을 모색하고 있다. 한일 간 협력은 두 나라 모두에 경제적으로 이익이다. 그러나 정치·외교적 갈등이 경제 협력을 방해하곤 한다. 한일 간의 갈등에 한국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그릇된 인식이 그 뿌리에 있다. 일본에 그 점을 적절히 지적할 수 있어야 하는데, 피해자로 가해자의 반성을 촉구하는 지금의 접근으로는 한계가 있다. 일본의 거듭된 사죄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그 사죄를 번번이 퇴짜 놓고 새로운 요구를 한다는 것이 일본 사회 일반의 인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식민지 시대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본 사회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미진하나마 상당 부분 진행된 지금, 일본을 향한 한국의 태도도 단순히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에서 벗어나 과거에 있었던 인간 존엄의 훼손을 돌아보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우방으로서의 충고가 돼야 하지 않을까.

기미년 독립선언문에서 우리 조상들은 오랜 원한과 잠시뿐인 감정으로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바른길과 원칙으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고 선언했다. 지금 봐도 놀라운 포부와 비전으로 침략자들을 훈계했지만 당시 우리 조상에게는 그들을 바꿀 만한 힘이 없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일본과 동등한 선진국이 되었다. 이제는 선진국 우방으로 그들에게 평화의 악수를 내밀고 인간 존엄이라는 가치를 함께 추구하자 말할 수 있다. 100여 년 전 우리 조상이 꿈꾸던 세상을 한일이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인간 존엄이 한일 관계의 초석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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