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할리우드 영화 '미키 17'이 박스오피스를 독주하고 있는 가운데 중·대형 배급사의 한국 영화 기대작들이 관객맞이를 준비 중이다.
지난 7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미키 17'은 전날 7만여 명(매출액 점유율 60.4%)이 관람해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했다.
'미키 17'은 지난 2월 28일 개봉해 하루 만에 24만8000여 명을 모은 데 이어 삼일절 연휴 기간 하루 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평균 매출액 점유율은 약 70%. 티켓 판매액을 기준으로 단순 환산하면 극장을 찾은 관객 10명 중 7명이 '미키 17'을 관람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평일 관객 수가 10만 명에 못 미치면서 흥행세가 한풀 꺾인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지만 누적 관객 수는 153만여 명으로 주말 동안 200만 관객 돌파에 도전한다.
영화계에 따르면 지난달 중순부터 이달 중순까지 개봉하는 한국 영화 중 제작비 50~80억원가량의 중규모 작품은 한 편도 없었다.
대만 영화 리메이크작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애니메이션 '퇴마록', 독립영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가 관객을 모으고 있으나 소위 '대박'을 기대하긴 힘들다.
통상 한국 영화 대작들은 여름 성수기와 추석 연휴, 겨울 성수기에 집중적으로 배치하기 때문에 3월부터 6월까지는 통상 한국 영화 비수기로 꼽힌다. 지난해 초 개봉해 깜짝 흥행을 기록한 '파묘' 때와 비교하면 올해 유독 한국 신작이 없는 편이다.
이는 개봉 전부터 제작비 약 1억1800만달러(1700억원)가 투입된 블록버스터이자 올해 상반기 최고의 흥행 기대작으로 주목받은 '미키 17'과 맞대결을 피하려는 배급사들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과 로버트 패틴슨를 시작으로 마크 러팔로, 스티븐 연, 나오미 애키 등이 연달아 봉 감독의 고국 한국을 찾아 영화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봉 감독은 인터뷰뿐만 아니라 인기 유튜브 채널에도 출연하며 열띤 홍보전을 벌였다.
업계에서는 외화로 분류되는 '미키 17'의 화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힘든 만큼 봉준호 감독과 정면 대결을 하고 싶은 영화는 없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미키 17'이 워너브러더스 측의 조정으로 개봉일을 연기할 때마다 국내 신작 개봉 일정 또한 변경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키17'의 독주를 멈출 자는 누구인가. 강하늘 주연의 '스트리밍'이 첫 주자다. 오는 21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구독자 수 1위의 범죄 채널 스트리머 우상(강하늘)이 풀리지 않던 연쇄살인 사건의 단서를 발견하고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며 벌어지는 스릴러다.
소설 '휴거 1992', '저스티스'의 창작자인 조장호 감독이 연출을 맡고 탄탄한 연기력을 입증해 온 강하늘이 구독자 수 1위의 범죄 전문 채널 스트리머 우상으로 분해 놀라운 변신을 선보일 예정이다.
오는 27일은 유아인 리스크로 말 많고 탈 많았던 '승부'가 개봉한다. 김형주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바둑계의 전설 조훈현(이병헌 분)과 그의 제자 이창호(유아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2021년 크랭크업한 후 2023년 넷플릭스 공개 예정이었으나 유아인의 프로포폴 투약 혐의로 수사를 받으며 일정이 보류됐다. 유아인은 최근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으로 감형돼 석방됐지만, 이날 '승부'의 제작보고회를 비롯한 각종 홍보 행사에는 불참했다.
예고편과 스틸컷, 포스터 등에도 배제됐다. 하지만 영화엔 편집 없이 그대로 등장할 예정이다. 김 감독은 "예고편, 홍보물 같은 경우는 불특정 다수에 노출되기에 그런 부분을 고려해 편집했다"며 "본편의 경우엔 (유아인 분량을) 편집하는 것이 이야기 성립이 불가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이기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영화가 개봉하면 충분히 납득하시리라 믿고 싶다"며 "감독 입장에선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 전 상처를 입었는데 거기에 또 생채기를 내고 싶지 않았고 의도대로 영화를 선보이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4월 2일엔 배우 하정우의 세 번째 연출작 '로비'가 개봉한다. '허삼관' 이후 10년 만에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허삼관'은 하정우에게 아픈 손가락이나 다름없다. 300억 원을 들인 이 작품은 누적 관객 수 98만 명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정우가 이 작품을 발판으로 흥행 부진을 끊을 수 있을지도 관심이다.
'로비'는 연구밖에 모르던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이 4조 원의 국책사업을 따내기 위해 인생 첫 로비 골프를 시작하는 이야기다. 골프라는 스포츠 특성상 골프장 내에서 여러 비즈니스가 오가는 것에 착안해 대한민국 최초로 로비 골프 세계에 영화적 상상력을 접목했다. 하정우 특유의 말맛이 도드라지는 작품일 것이라는 예상이다.
하정우는 "연출자로 내가 뭘 잘할 수 있나 수년간 고민하다가 '블랙코미디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인물들이 각자의 생각과 욕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가장 흥미롭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었다"고 밝혔다.
4월 23일 개봉하는 황병국 감독의 '야당'도 눈에 띈다. 대한민국 마약판을 설계하는 브로커 야당(강하늘),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검사(유해진), 마약 범죄 소탕에 모든 것을 건 형사(박해준)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엮이며 펼쳐지는 범죄 액션 영화다.
대한민국 마약 수사의 뒷거래 현장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야당'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첫 번째 영화다. 강하늘, 유해진, 박해준 등이 도파민을 폭발시키는 연기력을 선보일 예정이다.
매년 '범죄도시'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마동석은 이번엔 악마를 때려잡는다.
4월 30일 개봉 예정인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는 악을 숭배하는 집단에 의해 혼란에 빠진 도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어둠의 해결사 '거룩한 밤' 팀 바우(마동석), 샤론(서현), 김군(이다윗)이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오컬트 액션 영화다. 오컬트와 새롭게 만난 마동석의 거침없는 주먹이 '범죄도시' 시리즈를 잇는 흥행작을 만들지 관심이 집중된다.
올봄엔 비록 수백억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없지만, 다양한 연령층을 아우를 수 있는 작품들이 연이어 개봉을 앞두고 있어 극장가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한 관계자는 "'범죄도시'처럼 천만 관객 돌파가 확실시되는 작품은 없지만, 안정적인 성적을 기대할 수 있는 여러 영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인 시그널"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직까지 뚜렷한 흥행작이 없었지만, '미키 17'이 관객들의 관심을 끌면서 극장과 영화 산업 전반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진 가운데 앞으로 개봉할 한국 영화들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