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 감독, 정석적인 음악 싫어해…'미키 17', 사랑과 평화에 관한 영화"
"음악감독은 통역자…'정재일의 음악' 만드는 작업도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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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박원희 기자 = "음악감독은 통역자예요. (영화) 감독이 몇 년 동안 생각했던 음악적인 언어를 통역해준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저는 봉준호의 음악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영화 '옥자', '기생충'에 이어 '미키 17'까지, 연이어 봉준호 감독 작품의 음악 작업을 한 정재일(43) 작곡가.
봉 감독의 '통역자'로 함께해온 정재일 음악감독이 지난 5일 연합뉴스와 화상으로 만나 '미키 17'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미키 17'은 얼음 행성 '니플하임' 개척에 투입된 복제인간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의 여정을 그린 SF영화로 봉 감독의 여덟번째 장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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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일이 '미키 17'의 각본을 처음 접한 건 4∼5년 전이다. 어느 날 갑자기 봉 감독이 한번 읽어보라며 줬다고 한다.
정재일은 "'봉 감독님이 이렇게 따뜻한 영화를 만드는구나'라고 생각했다"며 처음 각본을 접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전체적인 콘셉트에 관한 봉 감독의 주문은 없었다고 한다. 정재일은 '미키 17'의 음악 작업이 "맨땅에 헤딩하는 식의 작업이었다"고 돌아봤다.
정재일은 '미키 17'에서 느낀 중요한 테마를 중심으로 음악의 가닥을 잡아나갔다.
"나샤와 미키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봉 감독님이 사랑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또 저한테 제일 중요했던 것은 인간과 크리퍼의 관계였습니다."
죽으면 프린트돼 다시 살아나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익스펜더블'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와 연인 나샤(나오미 애키)의 사랑, 새로운 행성 니플하임에 도달한 인간과 이미 행성에 살고 있던 크리퍼라는 존재가 맺는 관계가 음악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정재일은 특히 "크리퍼는 미키를 해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을 담을 수 있었던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미키 17이 예상치 못하게 크리퍼로부터 살아 돌아와 미키 18과 마주하면서 영화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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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처음 탄생한 곡이 바로 '나샤'(Nasha)다. 나샤와 미키가 처음 만나는 순간을 보고 만든 곡이다. 정재일과 봉 감독은 '나샤'를 변주해 '본 아페티'(Bon Appetit) 등 다른 곡도 만들었다. '나샤'가 '미키 17' 음악의 뿌리가 된 셈으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재일은 사랑 외에 다양한 영감으로부터 곡을 만들어 나갔다. 영화 속 크리퍼의 소리를 연상하게 하는 '카오스'(Chaos)와 '와이 킬 루코?'(Why Kill Luco?)는 몽골의 창법인 '흐미'와 알제리 고유의 사운드 '울룰레이션'(Ululation)을 활용했다.
영화 속 독재자 마셜(마크 러팔로)과 일파(토니 콜렛) 등이 부르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는 한국의 트로트 풍으로 만들었다. 마크 러팔로가 촬영장에서 이 노래를 자주 부르는 등 현장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에도 배우들이 직접 부른 이 노래가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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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계획적인 연출로 유명한 '봉테일'(봉준호와 디테일의 합성어)의 면모는 음악에서도 발현됐다. OST '메이헴'(Mayhem)의 초반 팀파니 연주를 레드제플린 드러머 존 본햄의 연주처럼 해달라고 주문하는 식이다. 봉 감독이 그만큼 음악을 좋아하고 잘 안다는 게 정재일의 전언이다. '기생충'에 이어 '미키 17'의 OST 모든 곡명을 직접 지을 정도로 봉 감독은 음악에 많은 신경을 쓴다.
정재일은 "봉 감독님은 평범한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정석적인 음악을 싫어하시니, 어떻게 하면 재밌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괴상한 울음의 노래, 한국 찬송가 느낌의 노래 등 봉준호의 영화만큼 독특한 '봉준호의 음악'은 정재일의 통역을 거쳐 이렇게 탄생했다. 어딘가 모르게 엉뚱하고 기존 음악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이 '미키 17'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정재일이 정의하는 '미키 17'은 어떤 영화일까.
"'미키 17'은 사랑의 영화이고 평화의 영화입니다. 지금 평화가 너무 없죠.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서로에게 따뜻한 얘기를 건네고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봉 감독님도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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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일은 봉 감독의 작품뿐만 아니라 황동혁 감독의 시리즈 '오징어게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 등 다양한 작품의 음악 작업도 했다. 몽골 창법('미키 17')을 비롯해 337박수('오징어게임'), 발칸반도 집시 음악('옥자') 등 다양한 원천을 활용해왔다.
정재일은 음악의 영감에 관해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안 나와서 학습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그렇다 보니 전통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다"며 "제가 모자란 게 많으니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사실은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 더 많다"면서 "'대학교 나왔으면 더 잘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아직도 있다. (음악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고민할 때가 있지만, 먹고는 살아야 하니 음악은 계속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최근에는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의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부터 위촉받은 곡의 작업을 끝냈다. 정재일은 "저 같은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소개했다. 신작은 오는 9월 서울시향의 연주로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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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일은 영화·드라마 OST 작업 외에 자신만의 음악 작업도 해왔다. 세계적인 음악 레이블 데카와 계약을 맺은 그는 2023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데뷔 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했다.
정재일은 앞으로도 본인만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저는 클라이언트(고객)가 요구하는 음악만 쭉 해왔어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싱어송라이터에 대한 꿈이 컸는데 실패하고 난 뒤 그냥 사람들이 써달라는 대로 써주면서 살아왔습니다. 다만 '음악만을 위한 음악'을 제가 너무 신경 쓰지 않았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마침 감사하게도 데카에서 저만의 음악을 해보라는 제안이 왔어요. 제가 계속해서 가져가고 싶은 꿈이 됐습니다."
encounter24@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3월08일 08시21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