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없는 삶의 역사[내가 만난 명문장/정의정]

1 week ago 1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

정의정 문학평론가·20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정의정 문학평론가·20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주인공 진주와 니콜라이가 서로를 인식하게 된 계기에는 하얀 봉투가 있다. 그 안에는 학교에 내야 할 돈을 재차 고지하는 안내문이 있었으므로 교무실에서 함께 봉투를 받을 때 그들이 서로의 형편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마트 아르바이트와 공장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이제 닫혀 있는 흰 봉투는 계약 종료 통지서나 병명 진단서, 혹은 그보다 더 두려운 미래로 그들에게 도착한다. 이때 미래란 진보하는 시간관 속에서 펼쳐지는 미래가 아니다. 이들 삶의 여건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나아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한 현실은 ‘미래 없음’이라는 미래로 계속해서 도래하며 현재를 정지시킨다. 산다는 것, 즉 현재의 시간이 지속됨에 따라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결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답보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소설은 이들에게 다른 방식의 역사-시간을 부여한다. 도입부에서 장황하게 펼쳐지는 ‘두 사람’의 역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을 거치고 컨츄리 꼬꼬와 다이나믹 듀오를 지나 진주와 니콜라이에게로 가닿는다. 이 시퀀스에서 주목할 점은 그 주인공들이 혁명가도, 세계적인 스타도, 천재 공학도도, 대중문화 아이콘도 아닌 진주와 니콜라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답보 상태를 사는 이들에게도 역사는 있다고 말한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정상성의 시계에 생애를 맞추기 보다 느슨하게 삶을 이어가는 태도로써 사람, 사물, 상황과 ‘친한 사이’ 하는 방법을 발명한다. 두 사람의 삶은 흐릿하고 느리게, 또 어쩌면 거꾸로일지라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사실,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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