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과 슈퍼컴퓨터[이기진의 만만한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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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유학 시절 내 연구실은 지도교수와 같은 층에 있었다. 지도교수가 사용하는 프린터는 오래된 것이라 논문을 프린트할 때 시간이 꽤 걸렸다. 그 시간에 내 방이 열려 있으면 들어와 한참 잡담을 하다 가시곤 했다. 바쁠 때면 솔직히 귀찮기도 했다. ‘새 프린트를 사시지….’ 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당시는 그런 느릿한 일들이 일상이었고, 그런대로 낭만이 있었다.

새 학기 준비로 강의 자료를 정리하다 5년 전 쓴 논문 뭉치를 발견했다. 다시 보니 ‘내가 이런 논문을 썼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당시 이 논문을 쓰기 위해 일 년이 걸렸고,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몇 번의 추가 실험을 해야 했다. 말 그대로 어렵게 통과한 논문이었는데, 다시 보니 그냥 평범하고 감흥 없는 오래된 화석 뭉치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흐름이 빠르다.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할 수도 없다. 속도의 문제는 물론이고 상상으로만 생각했던 일들이 눈앞에서 속속 실현되고 있다. 1년 간격으로 국제학회에 가면 완전히 새롭게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한다. ‘이게 가능할까?’ 하고 상상하던 일들이 눈앞에서 실현돼 나타났다. 학회에 앉아 있으면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긴장하게 된다. 분명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양자컴퓨터의 경쟁이 치열하다. 지난해 12월 9일 구글은 양자칩 ‘윌로(Willow)’를 이용해 슈퍼컴퓨터를 개발했다. 이 슈퍼컴퓨터의 성능은 당시 휼렛패커드 엔터프라이즈 프런티어가 개발한 ‘프런티어’의 성능을 넘어섰다. 프런티어는 2023년 12월 기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였다. 구글의 양자칩 윌로는 10²⁵(10자)년이 걸리는 계산을 5분 이내에 할 수 있다. 10자년이라는 시간은 1조의 10조 배에 해당되는 시간으로, 우주의 나이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얼마 전에는 경쟁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새롭게 ‘마요라나 1(Majorana 1)’ 양자컴퓨팅칩을 공개했다. 양자컴퓨터에 위상초전도체를 사용한 첫 번째 시도였다. 위상초전도체는 극저온에서 저항이 없는 물질로, 양자컴퓨터의 치명적인 단점인 오류를 제어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컴퓨터는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법을 사용한다. 반면 양자컴퓨터는 ‘큐비트(Qubit)’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큐비트는 양자역학적으로 0과 1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어 강력한 연산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외부 환경 변화에 매우 민감해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 양자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류를 바로잡는 기술이 필수적이다. 마요라나 1은 양자 오류 보정 기능을 갖추고 있는 양자 프로세서 유닛(QPU)으로, 분명 계산 속도나 정확도만큼이나 새로운 시대를 앞당길 것이다.

지도교수는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시골에서 개구리를 잡고 들판에서 놀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낭만을 모른다고 하시던 것이 기억 난다. 동감이다. 지도교수는 연구에 관해 토론할 때면 와이셔츠 앞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설명해 주시곤 했다. 그 영향으로 나도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다. 양자컴퓨터는 빛처럼 빠르게 계산하고 흘러가 버리지만, 만년필로 한 글자 한 글자 적는 시간은 깊고 느리게 흐른다. 지도교수님이 보고 싶고, 그 시절 또한 그립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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