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원호]선거의 시간, 정치의 시간

1 week ago 4

41대 美대선 재검표 혼란에 승복 연설한 고어
개표 오류-선관위 비리가 곧 부정선거는 아냐
지도자라면 ‘선거의 시간’ 끝내야 정치가 전진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00년 치러진 미국의 41대 대선은 역사상 가장 근소한 격차로 당선자가 결정된 선거인 동시에 가장 혼란스러운 선거였다.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와 민주당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이 맞선 선거에서 각 주 개표가 진행된 결과, 마지막 접전지인 플로리다에서 이기는 후보가 당선자가 될 상황이었다. 문제는 부시 후보가 플로리다에서 불과 1784표 차이로 신승했다는 사실이었다. 유효투표의 0.5% 미만으로 승자가 결정됐으므로 주(州) 선거법에 의해 의무적 재검표를 해야 했다.

재검표는 생각보다 문제가 더 복잡했다. 미국은 선거 관리가 분권화돼 있고, 특히 플로리다는 카운티별로 상이한 투·개표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검표가 상대적으로 손쉬운 OMR 투표기기를 사용하는 곳들을 먼저 재검표한 결과 사흘 만에 두 후보 간 격차가 불과 327표 차로 줄어들었다! 고어 후보는 즉각 4개 카운티에서 수기 재검표를 요구했고, 재검표가 진행됐다.

대통령뿐 아니라 주지사와 상·하원의원 등 대략 20∼30개 선출직을 동시에 뽑기 때문에, 당시 플로리다에서 주로 사용되던 투표용지는 천공식(Punched) OMR 카드였다. 문제는 이 용지가 재검표를 하기 위해 기계에 넣어서 돌리거나 사람이 만지면 심심찮게 없던 천공이 생긴다는 점이다. 유효투표가 무효가 되기도 하고, 해당 후보를 안 찍은 표가 우연히 구멍이 뚫려서 유효투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선관위 인력으로는 수기 재검표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절차 하나하나가 모두 소송 대상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선거를 치른 지 한 달이 지난 12월 12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재검표 중단을 명령하고, 다음 날 고어 후보가 선거 결과에 승복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선거는 막을 내렸다.

25년 전 먼 나라에서 벌어진 선거 이야기를 이 지면에서 새삼 다시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선거와 정치에 매우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선거와 투표는, 대부분의 사회 제도가 그러하듯,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100% 완벽할 수 없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선거를 보더라도 2∼4% 정도의 무효표가 나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천공 투표지를 교체해도 도장이 뭉개지거나 기표가 칸 사이에 찍히는 일이 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도 일어난다. 이런 오류들이 일방에 유리하거나 당락을 좌우할 정도로 크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둘째, 한국의 선관위를 보면 관료적 비대화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원봉사자 중심의 지방조직이 투·개표를 관리하는 해외 대부분의 나라들에 비해, 우리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공무원 3000명의 전국적 조직을 지닌 방대한 헌법기관을 남겨주었다. 그 방대한 조직이 국민들의 치열한 한 표를 담기에는 너무나 허술한 ‘소쿠리’로 표를 옮겼고, 심각할 정도의 가족 채용 비리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철저하고 치열한 청산을 통해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채용 비리 혐의는 철저하게 수사하되 그것이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방증하는 것인 양 몰고 가는 것은 명백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바람직하지 않다. 선거 당사자들인 국회의원들과 정당이 이번 기회에 직접 선관위법을 개정하겠다는 것도 이해충돌로 보인다. 셋째, 부정선거론과 관련된 음모론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2000년 미 대선 또한 민주당이 대통령직을 ‘도둑맞은’ 선거로 꼽고 있으며, 누군가는 중앙정보국(CIA) 주도의 부정선거로 부시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9·11테러와 중동 오일을 겨냥한 세계질서 재편의 큰 그림이라 말하기도 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음모론이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서버를 까라”고 하는데, 서버의 어떤 흔적을 봐야 부정선거가 아니라고 설득될 것인가? 예컨대 2022년 대선 당시 출구조사와 사전선거 여론조사는 각각 윤석열 후보의 득표율을 소수점 첫째 자리까지 맞혔는데, 선거 부정이 있었다면 가능하지 않을 현상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또다시 출구조사와 여론조사도 “소름끼치게 조작”됐다고 할 것이다.

선거라는 것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제대로 된 정치 지도자라면 선거라는 투쟁의 시간을 종결하고 공동체 전체를 위한 정치의 시간을 시작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아마도 고어 전 부통령은 너무나 잘 알지 않았을까. 덕분에 그 승복 연설은 영원히 역사에 남았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대통령이 자신이 이긴 선거이건 진 선거이건 승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선거의 시간, 투쟁의 시간에 머물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우리 정치의 시간은 그래서 계속 멈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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