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 보고서’ 펴낸 김진욱 초대 공수처장
헌재 “헌법 수호 위해 용납 못 해”… 탄핵, 헌정질서 위한 비상대응 장치
尹 둘러싸고 국론 분열 심각
탄핵 심판, ‘그들만의 리그’ 안 돼… 시간 걸려도 결정문 설득력 높여야
장외서 정치 구호 앞세우지 말고… 헌재 판단 차분히 지켜볼 때
누가 거짓말했는지는… 심판정서 가려질 것
김진욱 초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처장은 10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며 붉은색 표지의 ‘헌법재판소 판례집’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는 판례집을 펼친 뒤 박 전 대통령 탄핵 결정문을 찾아 ‘주문’ 바로 윗부분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피청구인은 자신의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에 대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대신 국민을 상대로 진실성 없는 사과를 하고 국민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피청구인의 이런 언행을 보면 피청구인의 헌법 수호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김 전 처장은 “바로 그다음 단락에서 헌재는 ‘이상과 같은 사정을 종합해보면 피청구인의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로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고 덧붙였다.“헌재가 여기서 바로 결론으로 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피청구인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는 내용이다.”
―왜 이 대목이 중요한가.
“헌재는 탄핵 결정문에서 박 전 대통령이 담화에서 국민에게 사과했지만 ‘그 내용 중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한 기간과 내용 등은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진정성이 부족했다’고 명시했다. 에둘러 한 표현이지만 최 씨의 국정농단 기간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다. 헌재는 또 박 전 대통령이 의혹 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검찰과 특검 수사를 수용하겠다고 해놓고도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 압수수색을 거부했다는 점도 ‘국민 신임을 위배한 행위’ 사례로 적시했다. 국회의 탄핵소추 사유가 된 국정농단 이후 발생한 박 전 대통령의 언행도 탄핵 사유 중 하나가 됐다는 뜻이다.”
―국민 신임 위배가 왜 탄핵 사유인가.“국민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게 부여한 정당성을 박탈해야 할 정도로 대통령이 신임을 중대하게 저버렸다면 임기 보장의 실익이 적을 수 있다. 그래서 파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때 헌재가 제시한 탄핵의 두 가지 기준 중 하나이고 현재도 유효한 선례다. 탄핵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민주적 제도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이후 책임을 부인하고 있는데….
“박 전 대통령의 탄핵 결정문은 대통령이 거짓말할 경우 파면 결정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 재판관들은 당연히 이 결정문을 검토했을 것이다. 거기에 비춰 보면 대통령이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고 헌재 재판관들이 판단할 경우 국민이 보내줬던 신임을 회수하는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다.”
―국민 신임을 헌재가 판단하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물론 사법기관인 헌재가 판결로 국민 신임을 재단할 수 없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헌재의 탄핵 결정문에 선례로 자리 잡았고, 실제 이 기준으로 박 전 대통령을 파면했다. 헌재 재판관들이 ‘우리는 국민 여론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라는 독단에 빠지기보다는 국민의 뜻을 잘 헤아려 현명하게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헌법이 미국 탄핵 제도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미국에도 ‘신임 위배’ 사례가 있나.
“우리가 1948년 제헌헌법을 제정하면서 미국식 대통령제와 탄핵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은 5번의 탄핵 사례가 있었는데 1974년 탄핵 전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경우 ‘국민의 신임을 위배했다’는 것이 탄핵의 중요한 사유였다.”
그는 “우리 사회가 윤 대통령의 계엄이 탄핵·파면 사유가 되는지 냉철하게 지켜보기보다 탄핵 제도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보수, 진보로 갈라져 싸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국 2번의 탄핵, 미국 5번의 탄핵 사례를 통해 탄핵 사유를 정리한 ‘대통령 탄핵 보고서’를 펴냈다.
―대통령 탄핵의 본질은 무엇인가.
“헌정 수호를 위한 비상 대응 장치다. 대통령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돼 헌정 질서를 위협할 경우 파면해 절대 권력이 되는 걸 막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때 헌재가 제시한 또 다른 탄핵 기준 한 가지는 무엇인가.
“탄핵 사유가 될 헌법·법률 위반은 사소한 위반이 아니라 중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와 정당, 선거제도로 구성되는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 존중과 권력 분립, 사법권 독립으로 대변되는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를 한 경우 탄핵 사유가 된다.”
―헌법 위반의 중대성은 추상적으로 들린다.
“임기 중 대통령을 파면하면 국정 공백 등 국가에 큰 손실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탄핵하려면 사유가 중대해야 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헌법·법률 위반의 심각성, 광범성, 반복성, 위험성이라는 네 가지도 탄핵 파면의 기준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네 가지 중 어떤 기준이 탄핵 사유로 가장 중요한가.
“위험성이라고 본다. 대통령이 직에 있는 것이 위험해 하루라도 그 자리에 둬서는 안 된다고 다수 국민이 판단하면 임기 중 파면이 정당화될 수 있다. 미국의 5번 탄핵 사례 중 2021년 1·6 의회 폭동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이 그에 해당한다. 국헌 문란의 목적으로 내란 폭동을 선동했고, 그 폭동으로 사람들이 죽었다. 퇴임 뒤라 파면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빠져나간 것이지만 위험성으로 보면 가장 심각하다.”
―광범성은 무엇인가.
“비상계엄을 예로 들어보자. 계엄 포고령에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계엄이 지속됐다면 자유를 제한해 모든 국민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사유인 국정농단과는 광범성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내란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형법상 내란죄는 국헌 문란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켰을 때 적용된다. 그런데 내란범은 ‘위험범’이다. ‘침해범’이 아니다. 국가기관 무력화 등 내란의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시도로 그 위험이 발생하기만 하면 처벌할 수 있다. 내란이 성공하면 처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탄핵 재판은 형사 재판과 다르지 않나.
“탄핵 심판은 헌재가 주도적 지위를 갖고 판단할 수 있는 직권주의다. 형사 재판에서 내란죄를 입증하려면 합리적 의심을 넘어 범죄 구성 요건에 해당하는지 엄격한 증명이 있어야 한다. 탄핵 심판은 그 정도의 증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헌재는 내란죄 성립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없지만 내란으로 볼 행위가 있었는지 팩트를 따질 필요가 있다.”
―헌재가 내란 관련 판단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면 국헌 문란 시도에 해당하고 내란은 시도 자체만으로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중대한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다. 미국 역시 실패한 반역도 탄핵 사유로 본다. 그래서 실제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가 있었는지 헌재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당은 국회 측이 탄핵 사유에서 내란죄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비판한다.
“일리가 있다. 물론 헌법 77조의 계엄 선포 요건에 해당하지 않음에도 계엄을 선포한 것 등에 대한 헌법·법률 위반 여부만으로 헌재가 결정문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내란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됐는데, 이를 쏙 빼놓고 결정문을 내면 설득력이 떨어지고 논란이 될 수 있다.”
―왜 탄핵 결정문의 설득력을 높여야 하나.
“지금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돼 있다. 탄핵 판단이 법관 등 ‘그들만의 리그’가 돼선 안 된다. 이런 때일수록 며칠 더 걸리더라도 탄핵 결정문의 완성도와 설득력을 높여야 한다. 파면을 결정했다고 해도 탄핵에 반대하는 이들이 헌재 결정문을 읽어 보고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을 이해했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긍이 간다’고 할 정도가 돼야 한다.”
김 전 처장은 “그래야 ‘한국에 민주주의,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구나. 한국이 위기에 처했었지만 다시 회복하고 있구나’라는 믿음을 국내외에 줄 수 있다. 장외 집회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탄핵 반대 집회는 여전히 격렬하고 ‘헌재 파괴’ 주장까지 나온다.
“보수, 진보를 떠나 우려된다. 국가를 왜 만들었나. 사법 질서 없이 국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고 모두 피해자가 된다. 보수의 가치는 나라의 근간을 지키는 것이지 기본 질서를 전복,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적 위기에 정치 구호를 앞세우면 안 된다. 차분하게 탄핵 심판을 지켜볼 때다.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는 탄핵 심판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김진욱 초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처장 |
△1966년 대구 출생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법학 석사 △1989년 사법시험 합격, 1992년 사법연수원 수료(21기) △서울지방법원 판사,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 △헌법재판소 선임 헌법연구관 △2021∼2024년 초대 공수처장 △저서: ‘공수처 아무도 가지 않은 길’(2024년) |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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