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대표 베테랑 배소현(32)에게는 '늦게 피어 더 아름다운 꽃'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2011년 프로로 전향한 그는 2·3부 투어를 뛰다가 2017년에야 정규투어에 입성했다. 투어 8년차였던 2024년, 적잖은 여자 선수들이 은퇴를 고민하는 31살에 첫 승을 올렸고 보란듯이 2승을 추가해 공동 다승왕까지 올랐다.
'커리어 하이' 직후 시작한 올 시즌, 배소현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많은 기업이 그를 후원하기 위해 줄을 섰고, 박현경 이예원과 나란히 메디힐 골프단의 간판이 됐다. 담담하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온 그이지만 주변의 기대는 적잖은 부담이 됐다. 14개 대회 출전해 커트 탈락없이 꾸준히 완주했지만 톱10이 두번에 그쳤다. 전년도 다승왕답지 않은 성적에 스스로도 조바심이 더해졌다고 한다.
답답한 전반기를 보낸 뒤 맞은 2주간의 공백, 배소현은 스승 이시우 프로를 따라 영국 북아일랜드에서 열리는 메이저대회 디 오픈을 찾았다. "골프를 시작한 뒤 해외 대회를 전 라운드 모두 관전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배소현은 "시야를 넓히고 오는 것도 좋은 자산이 될 것이라 믿었다"고 말했다. 프로선수로서는 쉽지 않은 베팅이지만 배소현은 경험의 힘을 믿었다.
한국에 돌아와 첫 출전한 대회에서 배소현은 자신의 믿음을 현실로 만들었다. 3일 강원 원주 오로라골프앤리조트에서 막내린 KLPGA투어 오로라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총상금 12억원)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시즌 첫승을 거머쥐었다. 배소현은 "연습량이 부족해 예선 통과를 목표로 나선 대회였는데 우승까지 해냈다"며 환하게 웃었다. 운으로 얻은 우승이 아니었다. 용감한 도전, 그리고 새로운 시도가 시너지를 발하며 빚어낸 값진 우승이었다.
◆대회 직전 스윙 교정, 클럽 교체 '베팅'
시작은 매끄럽지 못했다. 지난달 31일 1라운드, 배소현은 1타를 줄이는데 그치며 공동 60위로 경기를 마쳐 공백기에 발목이 잡히는듯 했다. 그는 "디오픈 기간 동안 이시우 프로님과 스윙, 어프로치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돌아오자마자 바로 교정에 들어갔다"며 "1라운드 때는 새로 도입한 포인트가 스스로 어색해서 잘 풀리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공동 60위, 커트탈락을 눈앞에 둔 자리에서 배소현은 과감함을 택했다. "2라운드부터 새로 교정한 스윙을 더 과감하게 적용하자"며 2라운드에 나섰고, 보기없이 버디만 6개 잡아내며 단숨에 공동 11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그리고 3라운드 전반 9번홀(파4)에서 샷 이글로 상승흐름을 굳힌 그는 이날 7타를 줄이며 최종라운드 챔피언조에 합류했다. 최종라운드에서도 배소현은 보기 없이 버디만 6개 잡는 완벽한 플레이로 1타차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올해 처음 신설된 오로라레이디스챔피언십이 열린 오로라골프&리조트는 사실 배소현에게 딱 맞는 코스는 아니다. 전장이 긴 편이 아닌데다 그린 주변에 해저드, 벙커가 자리 잡고 있어 그린을 정교하게 공략해야 한다. 상반기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 252야드로 6위를 달리고 있는 장타자 배소현이 장기를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인 셈이다. 그 역시"아이언 샷과 퍼팅으로 승부해야 하는 코스라 쉽지 않겠다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우승까지 거머쥔데는 전략적인 코스 공략, 그리고 새로운 클럽과의 환상적인 궁합이 주효했다. 이번 대회 직전, 배소현은 타이틀리스트의 신형 아이언을 들고 나섰다. 영국에서 돌아오자 마자 나선 대회여서 새 아이언과 호흡을 맞춰볼 시간도 없었다. 그는 "연습라운드에서 쳐봤는데 마음에 쏙 들어서 바로 대회에 갖고 나왔는데 가장 큰 무기가 되어줬다"고 소개했다.
5~9번 아이언은 T100을, 4번 아이언은 T250으로 구성했다. 새 아이언은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3라운드 17번홀(파3), 170m에 앞바람, 핀 위치도 까다로웠다. 배소현이 4번 아이언으로 친 샷은 평소보다 탄도가 더 잘 나와 원한 만큼의 스핀이 걸렸고, 버디로 이어졌다. 배소현은 "이 샷 덕분에 최종라운드에 챔피언조로 합류할 수 있었다. 3라운드 경기를 마친 뒤 '클럽을 바꾸길 잘했다'고 생각했다"며 방긋 웃었다.
◆"압박 이겨낸 매킬로이보며 겸허해져"
우승까지 내달릴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넓어진 시야, 그리고 달라진 마음가짐이었다. 투어 휴식기에 다녀온 디오픈은 배소현의 시야를 트여줬다. 그는 "1~4라운드 나흘간 매일 골프장에 나가서 걸어다니며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로 너무나 즐거웠다"고 미소지었다. "톱 플레이어들의 스윙을 보면서 코치님(이시우 프로)과 분석을 많이 했어요. 스윙 내내 중심축이 흔들리는 선수가 단 한명도 없더군요. 새삼 스윙하면서 중심을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바로 백스윙 교정에 들어갔죠."
쇼트게임은 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자극이 됐다. 낯선 링크스코스에서 다양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어프로치와 퍼팅은 매 순간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배소현은 "그간 골프는 '절반은 선수가, 절반은 운'이라고 생각했는데 디 오픈에서 톱랭커들을 보니 선수가 만들어내는 영역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내가 너무 안일하게 골프를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세계적인 선수들에게 받은 영감도 귀한 자산이다. 4월 마스터스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디 오픈을 7위로 마친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가 대표적이었다. "매킬로이가 고향에 돌아와서 한 경기였잖아요. 응원 열기가 엄청나서 사실 그의 경기를 갤러리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과거 인터뷰를 보니 이 골프장에서 처음 디오픈이 열렸을 때 부담감때문에 첫날 경기를 망쳤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큰 선수도 압박감 속에서 경기하는데 나 정도의 선수는 압박감을 느끼는게 당연하구나'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는 "스코티 셰플러(미국)가 연습루틴 등 기본적인 것을 지키는 모습을 보며 내가 지켜야할 기본에 대해 돌아보게 되더라"고 덧붙였다.
마음가짐도 다잡았다. 아쉬웠던 상반기를 보냈지만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고 한다. "강한 바람, 난해한 코스 세팅의 디오픈을 보니 '선수가 놓는 순간 끝난다'는 것을 알게됐어요. 저의 골프 역시 제가 그만하는 순간 끝난다는 것, 그러니 힘들어도 놓치말고 계속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은퇴하는 순간까지 우승경쟁하고파"
배소현은 이제 KLPGA투어의 대표 베테랑으로 꼽힌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우승경쟁을 하는 선수가 되고싶다"는 그는 "오늘 챔피언조에서 동생들과 경쟁하는 매 순간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베테랑을 넘어, 롱런을 하는 것도 목표다. 그는 "빨리 은퇴하는 선수들을 보면 안타깝다"며 "골프선수로서의 삶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삶도 챙기면 더 즐겁게 경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저는 이번에 영국에 다녀오며 귀국 전 하루를 할애해 야경투어도 하고,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품을 감상하며 오롯이 저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왔어요. 이런 재충전과 밸런스를 통해 골프를 더 길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롱런을 위해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역시 체력이다. 그는 "부상이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을 해서 부상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31살에 커리어하이를 찍은 배소현은 이번 대회에서 새로운 기록을 추가했다. 지난해 54홀 경기에서만 3승을 거뒀는데, 이번에는 4라운드 72홀 경기에서 우승한 것. 그리고 지난해 더헤븐 마스터스에 이어 올해 오로라 레이디스 챔피언십까지 2년 연속 초대 챔피언에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다음 목표는 메이저 우승, 그리고 타이틀 방어다. 그는 "올해 두개 대회에서 모두 타이틀 방어에 실패했다"며 "이달말 열리는 kg레이디스오픈에서는 꼭 타이틀방어에 성공하고 싶다"고 환하게 웃었다. 배소현이 만들어가는 꽃은 더 크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원주=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