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간 금융시장이 불안해질 때마다 금융당국 수장이 공통적으로 꺼내 드는 레퍼토리가 있다. “100조원 규모 시장 안정 프로그램을 가동하겠다”는 말이다. 작년 4월 미국발 관세 충격으로 증시가 급락했을 당시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그랬다. 최근 미국과 이란 간 전쟁 여파로 증권·외환시장이 출렁이자 이억원 금융위원장도 같은 메시지를 냈다. 시장 불안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는 느낌이다.
이 프로그램은 2022년 10월 50조원 규모로 처음 등장했다. 레고랜드 사태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및 채권시장이 급랭했을 때다. 이후 부동산 PF 지원책이 속속 추가돼 100조원 규모가 됐다. 지금은 크게 38조원 규모 채권·단기시장 안정과 61조원 규모 부동산 PF 지원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PF 지원 프로그램은 보증이 대부분인 데다 쓰임새도 정해져 시장 불안에 바로 투입하긴 어렵다. 실제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은 채권시장안정펀드(20조원), 정책금융기관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10조원), 신용보증기금의 유동화증권(P-CBO) 프로그램(약 2조원) 등 채권·단기시장 안정 장치다. 정부는 필요하면 증권시장안정펀드도 조성해 투입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부 경제 수장의 위기 초기 구두 개입은 필요하다. 시장 안정 프로그램도 위기 시 유동성 공급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레고랜드 사태에서 확인됐듯 국내 채권·단기시장 안정 장치들은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가장 규모가 큰 채안펀드부터 그렇다. 레고랜드 사태 때 비우량 기업엔 사실상 자금을 공급하지 못했다. 증안펀드처럼 수십 개 민간 금융회사와 유관 기관이 공동 출자하는 구조여서다. 원금 손실을 우려하는 금융회사 때문에 채안펀드는 우량 채권만 매수한다.
정책금융기관의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과 P-CBO가 레고랜드 사태 때 자산담보부기업어음(PF-ABCP) 등을 수조원어치 떠안았지만, 시장 전반에 퍼진 비우량채 기피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정부는 당초 50조원 프로그램 외에도 5대 금융지주의 유동성 공급 확대(95조원), 9개 대형 증권사의 PF-ABCP 매입 기구 설립(2조원), 은행권 등의 정상 PF 사업장 보증 확대(15조원) 같은 추가 대책을 잇달아 내놔야 했다.
한국처럼 민간 금융회사에 과도하게 의존한 위기 대응은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 위기 때마다 유동성 사정이 함께 악화하는 금융회사들이 위기 대응 재원까지 마련해야 하는 구조여서 속도와 규모 모두 제약을 받는다. 여기에 사후 부실 발생 시 책임을 어디까지 면해주는지에 관한 기준마저 한국엔 불명확하다. 금융회사의 재원 출연을 더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금융시장 안정화 기구’ 모델은 시사점이 크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를 거치며 정부와 중앙은행(Fed)이 역할을 분담해 위기 대상을 정밀 지원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특수목적기구(facility)를 세워 Fed가 대출로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하고, 손실은 재무부가 통화안정기금(ESF)으로 떠안게 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미국은 회사채·CP·유동화증권 매입은 물론 소상공인·개인 대출 지원을 목표로 한 10여 개 기구를 신속히 마련해 코로나19 위기를 진화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도 코로나19 사태 당시 미국식 모델을 본뜬 기구를 도입한 적이 있다. 저신용 회사채·CP까지 매입할 수 있는 10조원 규모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다. 산업은행이 손실 보전용 자본을 대고, 한국은행이 금융통화위원회 의결을 거쳐 선순위 대출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SPV는 4년 만에 해산했다. 지금도 한은법에는 이 같은 안정화 기구 운용 권한이 명시돼 있지 않다. 다음 위기 때 다시 가동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위기 발생 빈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부·한은 역할이 불분명하고 민간 금융회사 의존이 과도한 현행 시장 안정 프로그램은 보완이 필요하다. 규모를 내세우기보다 위기 때 도덕적 해이를 막으면서도 더 신속하고 과감하게 작동할 수 있는 효율적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때마침 금융 안정을 중시하는 신현송 전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국장이 차기 한은 총재로 지명됐다. 제도 보완 논의가 본격화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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