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명의 핵심 인재가 동시에 사표를 냈다. 당황스럽다. 그런데 그 배신자들이 페어차일드의 투자를 받아 경쟁사를 차렸다. 황당해진다. 게다가 우리 기술을 응용해 값싼 실리콘을 적용한 반도체를 개발해서 항공우주국(NASA)에 납품한다고? 반도체 발명으로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은 경영자 윌리엄 쇼클리는 머리끝까지 뿔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페인 전통이 강해 학회에서 별도 세션을 운영할 정도로 유별난 미국 캘리포니아 노동법 때문이었다. 회사는 이직자에게 태클을 못 건다. 심지어 팀 전체가 한 번에 옮겨가도 그렇다. ‘그런 일이 안 생기게 평소에 잘하지. 뭐 했냐’는 거다. 그 대신 해고도 매우 자유롭다.
쇼클리는 ‘조져야 성과가 나온다’주의자여서 직원을 노예처럼 부렸다. 거짓말 탐지기로 부하를 닦달하던 그간의 행태를 고려하면 소송을 가봐야 이길 가능성은 제로! 8인의 배신자가 그렇게 떠난 후 회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며 3년 만에 사라졌다. 예나 지금이나 인재를 함부로 대하면 이런 꼴이 난다.
그런데 그 배신자들에게 투자한 페어차일드, 전혀 페어하지 않았다. 직원이 만 명을 넘어갈 정도로 급성장했지만 그걸 주도한 기술자 8인을 ‘대체 가능’한 ‘그냥 노동자’로 생각하고 ‘너~무 평등한’ 보상 체계를 유지했다. 진짜 참아줄 수 없는 건 기술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대목이었다. 지분 보유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고루한 금융자본가에게 정나미가 뚝 떨어진 8인의 배신자, 한 번 했는데 두 번을 못할까? 몇이 뛰쳐나와 독립적인 경영권을 약속한 아서 록의 벤처투자를 기반으로 ‘인텔’을 창업한다. 다른 몇은 최근 주목받는 ‘AMD’를 세웠다. 핵심 인재가 빠져나간 페어차일드? 끝이 뻔할 수밖에. 또 몇은 세쿼이아, 클라이너퍼킨스 같은 벤처캐피털을 설립했는데 그들이 투자한 스타트업이 아마존, 구글, 시스코, 링크트인을 포함해 무려 2000개다.
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엔지니어들에게 ‘해방 자본’을 제공할 테니 ‘월급 노예’를 그만두고 스타트업을 창업해 세상을 바꾸자고 유혹했다. 기술 인재에겐 압제에서 해방을 선사하는 메시아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뭐 그 와중에 벤처캐피털이 가장 많은 돈을 벌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배신자의 전성 시대를 거치며 사과 농장이 흩어져 있던 동네에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별나게 유연한 노동법이었다. 8인의 배신자는 65개 회사를 창업하고, 수많은 스타트업에 투자해 기술 인재가 지분 보유자보다 우위에 서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곳에선 물려받은 재산, 국적, 피부색과 관계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세계 최정상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월가의 금융자본주의를 제치고 기술자본주의 시대를 열었다. 지금 세계 부자가 죄다 거기에 있다.
예전에 어떤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가 ‘그게 대통령이 할 소리냐’는 야당의 공격을 받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그 권력이 기술 인재에게 넘어갔다. 추세를 막아보려는 걸까?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할 경우 벌금을 15억원에서 65억원으로 상향했다. 늦었지만 잘했다. 하지만 그걸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영입하려는 자가 몇 배의 연봉으로 유혹할 만큼 그들 머릿속에 있는 기술이 대단하다면 그간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지 않고 ‘염가’로 부려 먹은 건 아닐까? 권력이 이미 그들에게 넘어갔는데 말이다.
40년 전 추격자이던 시절, 우리 선배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선진국의 노하우를 모방하고 베껴서 여기까지 왔다. 당시 모방 대상인 일본은 유출을 막으려고만 하다가 많은 걸 잃어갔지만 미국은 인재를 자유롭게 풀어놓는데도 격차를 더 크게 벌렸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라는 진정한 대인배의 자세인가? 어느 순간 지킬 게 생겨버린 우리, 누군가가 실패한 그 방법으로 절박한 추격자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인재들이 의과대학으로, 미국으로, 중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마당에 애국심이나 애사심은 해결책이 못 된다. 더 이상의 인재 유출로 힘이 빠지기 싫으면 그들에게 획기적인 존중과 보상을 제공할 때? 이미 지났다. 한참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