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발병률 높이는 뇌질환… 뇌질환 악화시키는 뇌전증[이진형의 뇌, 우리 속의 우주]

2 weeks ago 4

뇌전증의 원인과 진단
몸 떨고 흔들면서 굳어지는 뇌전증… 과거 ‘악령에 사로잡히는 병’ 오해
원인 다양하지만 뇌 손상에서 기인… 뇌전증 환자는 뇌질환 더 많이 생겨
조기 진단해야 지속적 뇌 손상 막아

뇌전증을 앓은 유명 인사들 왼쪽 사진부터 영국 국민작가 찰스 디킨스, 미국 육상 영웅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21세기 신데렐라’ 가수 수전 보일, 영화 ‘반지의 제왕’ 배우 휴고 위빙. 동아일보DB·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뇌전증을 앓은 유명 인사들 왼쪽 사진부터 영국 국민작가 찰스 디킨스, 미국 육상 영웅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21세기 신데렐라’ 가수 수전 보일, 영화 ‘반지의 제왕’ 배우 휴고 위빙. 동아일보DB·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생명공학과 교수

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생명공학과 교수
《‘퀸 엘리자베스’라는 오스트리아 왕비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는 황제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이 죽어간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일은 내 딸 안나가 세 살 때 시작됐어. 그 애는 몸을 떨고 흔들었지. 그다음에는 그 작은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어. 무슨 병인지 아무도 몰랐다. 대주교는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했지만…》

처음에는 몇 주마다 한 번씩이었고 그러다 더 잦아졌지. 의사들은 희귀한 신경질환이랬어. 의사들이 사혈을 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그 가는 팔에서 피를 뽑았다. 그 애의 머리카락을 밀고 두피에 거머리를 붙였어. 그 애에게서 질병을 빨아내도록 말이다. 안나는 비명을 질렀어. 비명을 그치지 않았지. 의사들은 꼭 해야 한다고 했어. 몇 시간만 더 해야 한댔지. 하지만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었어. 내가 의사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 애를 안았어. 해가 몇 번이나 떴는지도 모르고, 어디까지가 그 애 몸이고 어디까지가 내 몸인지 모를 만큼 꽉. 나흘 후에 안나는 죽었다.”

여기 나오는 안나의 병은 뇌전증일 것이다. 갑자기 몸을 떨고 흔들고, 돌처럼 굳어버리는 것은 뇌전증 환자가 가질 수 있는 증상이다. 뇌전증에 대한 이해가 없던 과거에는 뇌전증을 악령에 사로잡히는 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여기에 중요한 이야기가 또 나온다. 몇 주마다 한 번씩 있었던 증상이 더 잦아졌다는 것이다. 뇌전증은 발작을 일으키는 그 자체로 뇌 회로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지속적인 뇌전증은 뇌 회로를 망가뜨린다. 뇌전증이 지속되면 뇌 회로가 망가져서 병세를 점점 더 심각하게 만든다.

뇌전증이 생기는 원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뇌전증은 흔히 △교통사고로 인한 뇌 손상 △분만 중 뇌 손상 △뇌염이나 수막염으로 인한 뇌 손상 △뇌 종양 △뇌 혈관 기형 △미숙아 △뇌 형성에 문제가 생긴 경우 △뇌 내 기생충 △유전 등으로 알려져 있다. 얼핏 보면 별로 관계가 없는 여러 요소가 뇌전증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공통점은 모두 ‘뇌 손상’이 오면서 생긴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사고든, 발달 장애든, 염증에 의한 손상이든, 유전에 의한 것이든 말이다. 뇌 손상은 이 외에도 여러 다른 뇌질환에 의해 생길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뇌질환 환자가 일반인에 비해 뇌전증 발병률이 높다는 것 또한 뇌전증이 뇌 손상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하는 중요한 힌트다. 뇌질환은 뇌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그 손상이 심해지면 뇌전증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뇌전증이 생기면 이는 또다시 뇌 손상을 가속화한다.

뇌전증 발병률이 높은 사람이나 뇌전증 환자는 뇌종양, 뇌졸중, 다발성 경화증, 치매, 파킨슨병, 자폐증,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수면장애, 불안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약물 중독 등 거의 모든 뇌질환이 더 많이 생긴다. 그뿐만 아니라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는 여러 가지로 건강이 취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뇌 손상의 확률이 높고, 따라서 뇌전증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뇌질환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치병이다. 예를 들어 치매나 자폐 같은 질환을 완치시킬 방법은 없다. 다만 뇌전증은 치료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질환이다. 이 때문에 뇌전증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뇌전증을 치료하면 뇌질환으로 생긴 뇌 손상이 뇌전증을 일으켜서 뇌를 더욱더 지속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뇌전증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나처럼 발작을 크게 일으켜서 뇌전증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뇌전증도 있다. 다른 뇌질환이 동반된 경우에는 다른 질환으로 인한 증상인지, 뇌전증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무엇보다 뇌전증인지 여부를 정량적으로 진단하고 그에 따라 치료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뇌전증 진단은 뇌전증 발작에 관련된 뇌파가 있는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뇌파를 측정하고 읽고 해독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뇌파의 신호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노이즈가 많은 데다 그 안에서 뇌의 복잡한 회로 활동을 읽어내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장기간 수련을 한 전문의만이 읽어낼 수 있는 만큼 관련 인력 부족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하다. 뇌파를 측정해야 하는 많은 환자들이 적절한 검사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이하면서 희망이 보인다. AI로 데이터를 분석해 의사들을 돕는다면 뇌전증의 진단과 치료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할 것이다. 뇌전증 환자로 명확히 구별되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뇌질환이 의심되는 환자나 뇌의 건강상태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이 모두 뇌전증이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뇌전증으로 뇌가 지속적으로 망가지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다. 악령이 들렸다고 생각한 대주교나 희귀한 신경질환이라고 생각한 의사나 모두 잘 알지 못해서 안나에게서 피를 뽑았고 이는 안나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역사 속의 의료행위를 지금에 와서 보면 ‘아, 어떻게 저런 의료행위를 했을까’ 싶은 것들이 많이 있다. 뇌전증을 치료하기 위해 사혈을 한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보다 나은 의료의 미래는 아는 힘을 키우는 데 있다. 정확한 뇌 진단을 통해 지금의 의료가 얼마나 미개했는지 생각하게 되는 첨단 뇌 의료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

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생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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