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 콘크리트에 빗댄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정성갑의 공간의 재발견]

2 weeks ago 3

‘건축물 자체가 건축가의 개별적 회고록. 천국이자 지옥, 축복이자 좌절이 다 들어 있는….’

영화 ‘브루탈리스트’를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했던 메모다. 소설이나 그림 같은 창작물을 빗대 종종 ‘자식’이라고 표현하는데, 건축가에게 본인이 설계한 건축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나 자신, 나의 모든 것이라 해도 되겠다. 짧게는 1년, 길게는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집착과 헌신의 결과물. ‘땅 위에 올라간 삶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비유는 아닐 것이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러닝타임만 3시간 35분, 곧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이 영화를 기다렸고 개봉하자마자 관람했다. 각본과 감독을 맡은 브레이디 코베이는 올해 37세. 이리 젊은 나이에 한 인생의 직업적 절망과 환희, 굴곡과 비애를 밀도 높게 그려낼 수 있다니 놀라웠다. 중간에 15분간의 쉬는 시간(인터미션)까지 있는 긴 영화를 만들어 관객에게 몰입의 즐거움을 선사한 데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감독의 메시지는 제2부의 타이틀인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에 담겨 있다. 영화가 차용하고 있는 건축 사조 ‘브루탈리즘(brutalism)’은 단단한 콘크리트에 별다른 장식을 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감하는 양식을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1970년대 유행한 공법으로, 노출 콘크리트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베통 브뤼트(Beton Brut)’가 그 어원이다. 벽돌을 쌓고 나무를 덧대는 수공예적 아름다움보다는 혁신적 재료와 기술이 있는 산업적 아름다움에 매혹된 이들의 방식.

영화의 주인공인 라즐로 토스는 노출 콘크리트의 무채색 단단함을 아름다움의 견고한 바탕이자 본질이라 생각한다.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처음 세상에 세워졌을 때의 반응을 상상하면 재미있다. 아름다운 색채와 손맛으로 빛나야 할 건축물이 잿빛 얼굴을 한 채 거대한 기계처럼 흉측하게 서 있는 꼴이라니. 하지만 남다른 매혹과 신비는 그 안에서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힘 있는 선과 면, 회색 몸통에 환상처럼 깃든 빛과 자연을 마주하면 이 산업적 아름다움이 인간의 영성이나 시적 아름다움과도 묘하게 통한다. 영화에서 보여 주는 도서관 작업과 종교 시설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노출 콘크리트 건축은 심플하면서도 터프한 미감과 구조 그 자체로 강력한 예술의 몸통이 된다.

건축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이 영화를 건축적 시선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은 노출 콘크리트의 은유이자 무수한 절망과 좌절, 치욕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끝내 걷고 걸어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한 주인공의 인생에 대한 헌사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자산가는 건축가를 ‘건축주의 창녀’라 생각하고, 이들과의 대화가 자신에게 지적 영감을 준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인공을 핍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무너지지 않는 인간됨을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이라 여기는 것이다.

결말부의 이 말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이지 과정이 아니다.” 저 끝에 이르는 길에 온갖 상처와 피가 가득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시간에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아가 마침내 목적지에 가 닿는 것. 감독은 그 완주의 삶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는 것 같았고 그런 생각 자체가 큰 힘이 됐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3시간 넘는 긴 여정으로 보여준 의도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여정 자체만 보면 거대한 비극이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은 경쾌하다. 다시 나아갈 이 세상의 모든 인생에 힘찬 박수를 보내듯이.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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