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친위 쿠데타를 했다고? 놀라는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현대사 교과서에선 보통 ‘부산정치파동’으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자기 권력기반 강화를 목적으로 군을 동원해 헌정질서를 중단시키는 것이 바로 친위 쿠데타다. 안보전문가 박성진도 최근 책 ‘용산의 장군들’에서 1952년 이승만 발췌개헌과 1972년 박정희 유신을 친위 쿠데타로 꼽았다. 지난날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대한민국 수립에 앞장섰고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받아낼 이승만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선 자유와 민주도 뒤엎었던 것이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1950~54) 총선이 실시됐다(제헌의원 임기는 2년). 210석 중 친이승만계 당선자는 겨우 57명. 민국당 등 야당계도 27명에 불과했고 무소속이 126명이었다. 제헌국회를 보이콧했던 남북 협상파 즉 좌파와 중도파가 압도적이라는 얘기다. 요새로 치면 여소야대 정국이었다.
국회는 대통령이 제출한 의안을 번번이 부결시켰다. 이승만은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맞섰다. 재임 12년(1948~60) 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45건의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그 중 25건이 2대 국회 때였다. 윤석열 역시 25건이다. 12·3 전까지 2년 7개월 만에 이승만을 따라잡았다(한덕수 6건, 최상목 7건 추가하면 더 많다). 25건 중 5건이 본인과 부인 관련이었다.
1951년 1월 국민방위군사건이 터졌다. 정부가 국민병으로 징집한 장정 수만 명이 보급물자를 제대로 못 받아 얼어 죽고 굶어죽은 최악의 군수비리사건이다. 2월엔 공비소탕작전을 벌이다 우리 군이 무고한 우리 국민 수백 명을 사살하는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났다.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진상조사위원회는 5월 국회 본회의에서 군 간부들이 예산을 횡령했고 이 중 일부가 여당계에 정치자금으로 흘러갔다고 보고했다. 거창을 찾아간 국회조사단에 공비로 가장한 군이 총격을 가해 사건을 은폐하려는 일까지 드러났다.
이승만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결심한 것도 이런 사정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국회는 연일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하는데 제헌헌법에 따른 국회 간선제로는 다음해 여름 대선에서 재선이 불안했다. 이승만은 2월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언급했다(남시욱 2021년 ‘보수세력 연구’). 국민을 동원하는 데는 이승만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인촌은 일주일에 두 번씩 열리는 국무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이승만은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일이 드물어 인촌이 회의를 주재하는 일이 많았다. 6·25전쟁 1주년 다음날인 51년 6월 26일 어쩐 일인지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이 “신성모 씨를 주일대표부 공사에 임명하려고 하는데 좋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을 드시오” 하는 것이었다.
역시 손드는 국무위원이 없었다. 이승만은 오후에 다시 논의하자며 일어났다. 인촌은 몸이 아파 오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승만은 이미 아그레망을 받아놓고 국무회의에 회부했던 거였다. 장면 총리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 표결에 붙인 결과는 부결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신성모를 주일공사로 내보내고 말았다. 윤석열도 채 상병 사망 의혹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정종섭 전 국방장관을 호주 대사로 서둘러 내보낸 바 있다. ‘런종섭’의 원조가 ‘런성모’인 꼴이다.
인촌은 부통령으로서 대통령과 더불어 일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이승만의 독단에 분노한 인촌에게 안면마비 증상이 나타났다. 뇌혈전증으로 오른쪽 수족을 못 움직이는 증상까지 생겨났다(이진강·황호택 ‘인촌탐사 김성수’).
● “국회 해산” 백골단…“탄핵 반대” 시위대
민심은 흉흉했다. 신성모를 싸고도는 데서 보듯 이승만은 아첨꾼을 총애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당파를 초월한 자유민주주의자를 자처했지만 뒤로는 사당(私黨)같은 여당을 만들었다. 이승만의 리더십과 행정능력에 회의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았다. 51년 말 이승만이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은 52년 1월 표결에서 찬성 19표, 반대 143표로 처참히 부결됐다.
폭력과 공포 속에 재적 2/3인 123명의 의원들이 4월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재선을 포기할 수 없는 이승만은 5월 14일 다시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공고했다. 이제 대화와 타협으로 정치를 복원하면서 지지표를 늘려가면 좋으련만, 대통령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임기 만료가 두 달 앞! 이승만은 24일 원외자유당 부당수인 이범석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다음날 0시를 기해 부산과 영남 호남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 “직선제 개헌하면 종신집권 개헌도 가능”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군 동원을 거부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충복인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해 예정된 각본대로 밀어붙였다. 26일 국회 전용버스로 출근하던 국회의원 50여 명을 버스째 견인해 헌병대에 끌어다놓더니 국제공산당조직에 연루됐다고 조작 발표를 서슴지 않았다. 국회는 28일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재석 139명 중 96표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승만은 이것도 무시했다.
‘한 사람이 거의 황제에 가까운 권한을 쥐고 있는 대통령제’가 인촌이 지적한 대통령제의 폐해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인촌은 “우리는 이미 대통령제의 산고(酸苦)를 충분히 체험했다”며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직접선거라는 것은 곧 현 집권자의 재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재선되면 장차 국회는 그의 추종자 일색으로 구성될 것이며 그 후에 그는 그의 삼선, 사선을 가능하게 하도록 헌법을 자재로 고칠 수 있을 것이니 이처럼 하여 종신 대통령이나 세습 대통령이 출현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느냐”고 피를 토하듯 밝혔다. 54년 이승만의 삼선·사선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 72년 박정희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 개헌까지 정확히 내다본 것이다.
● “반란적 쿠데타가 아니고 무엇이냐”
인촌은 대통령 직선제를 압도적 다수로 부결시킨 국회를 “의회독재”라며 험구한 이승만에 대해 ‘민의와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건전한 이성을 말살하고 절대권력을 장악하려는 전형적 독재주의 노선을 걷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때까지도 아직 대한민국의 최고 집정자가 그래도 완전히 사직(社稷)을 파멸하려는 반역 행동에까지 나오리라고는 차마 예기하지 못하였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돌연 비상계엄의 조건이 하등 구비되어 있지 아니한 임시수도 부산에 불법적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소위 국제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누명을 날조하여 계엄 하에서도 체포할 수 없는 50여 명의 국회의원을 체포 감금하는 폭거를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 공산화보다 낫다…미국이 개입한 발췌개헌
인촌의 부통령 사임서는 미국까지 파문을 던졌다. 미 대사관과 유엔군도 분주히 대책을 논의했다. 사태를 파악한 트루먼 대통령은 6월 3일 “현 한국 정세는 나에게 큰 충격을 준 바 이것이 조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중대 사태가 야기될 것”이라는 친서를 이승만에게 보냈다. 이승만은 2일 오전 국회로 날린 최후통첩(24시간 내 직선제 개헌안 통과시키지 않으면 국회 해산)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장택상 총리가 제안한 타협안이 대통령 직선제+국회 양원제라는 발췌개헌안이다. 미국은 과도한 혼란이 공산화를 가져올지 모른다며 이승만 집권연장을 용인하기로 했다(이완범 2007년 논문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에 관한 연구’).
계엄령 아래 국회가 개원됐다. 7월 4일 무장경관과 헌병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상태에서 표결이 실시됐다. 정족수 가 모자라 공산당에 연루됐다며 감금됐던 의원들까지 풀려나 기립표결 했다. 재적 166명 중 기권 3명 빼고 전원 찬성이었다.
● 이승만 “인촌의 위대함 누구나 인정”
이승만은 휴전으로 나라가 또 분단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선 직선제 개헌을 통해 자신이 개선돼야 한다고 확신했다(김충남 2016년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현대사’). 그가 대통령이 된 덕분에 오늘날의 한미동맹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친위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인촌의 혜안대로 이승만은 종신집권도 가능케 하는 54년 사사오입 개헌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60년 4·19혁명으로 물러난 불행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 사족 : 1955년 2월 18일 인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승만은 상가로 조문을 왔다. 국민장을 치를 때는 대통령 조사(弔辭)를 수석 국무위원 변영태가 대독하게 했다. “중간에 불행히도 정치적 입장으로 길이 갈라지게 된 것이 김 공에게도 많은 섭섭함을 주게 되었다”면서도 “왜정 말기에 압박이 극심한 때에 이 분이 집안 재산을 털어서 교육사업을 시작했으며 일면으로는 신문(동아일보)을 내어서 일정(日政)에 반대하여 왔으니 이것만으로도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애도를 표했다. 그래도 이승만은 큰 어른이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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