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도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12·3 비상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1월 15일 체포된 직후 ‘국민께 드리는 글’에서 “투개표 부정과 여론조사 조작을 연결시키는 부정선거 시스템은, 이를시도하고 추진하려는 정치세력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이 필요함을 보여준다”며 “이 상황이 전시, 사변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입니까? 아닙니까?” 물었다.
● 부정선거 때문에 국가비상사태라고?그런데 어쩌나.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 2024’는 윤석열 계엄 탓에 167개국 중 32위로 전년보다 10계단 추락했지만 선거과정만은 10점 만점에 9.58점, 공동 2위다. 지난달 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산하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내용을 다시 들여다본 결과다.
윤석열은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 대국민담화에선 부정선거의 ‘부’자도 입에 담지 않았다. 4차 담화, 즉 12일에야 “비상계엄이라는 엄중한 결단을 내리기까지 그동안 직접 차마 밝히지 못했던 더 심각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며 “국정원 직원이 (선관위)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방화벽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어마무시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묻고 싶다. 만일 그가 1월 15일 주장한대로 “총체적인 부정 선거 시스템이 가동”됐다면 EIU가 9.58점을 주는 것이 가능했겠나.
5개 민주 지표 가운데 우리나라가 그래도 제일 점수 높은 항목이 ①선거과정과 다원주의였다.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한지(언론자유와 표현자유도 중요하다), 선거 뒤 패자의 승복과 질서 있는 정권 이양이 진행되는지가 평가 내용이다. 한국은 2021~2024년 그러니까 문재인 정권 5년차부터 윤석열 계엄까지 9.58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선거과정만은 계속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정하게 치뤄졌다는 얘기다. 2020년 선거과정은 9.17점으로 좀 떨어졌지만 그래도 2024년 미국과 같은 수준이었다. 윤석열 주장대로 결코 부정선거가 자행됐다고 볼 순 없다는 말씀이다.
● 윤석열 “선관위 군 투입 지시” 자백했다
그가 국회 탄핵소추 사유를 전면 부인하면서 유일하게 인정한 것이 있다. 선관위에 군 병력 투입을 지시한 사실이다. 윤석열은 2월4일 탄핵심판 5차 변론에서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의 증언이 끝난 뒤 “잠깐 말씀드려도 되겠냐”며 굳이 발언 기회를 얻어 밝혔다. 비상계엄 당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군 병력을 보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헌법기관을 불법 점거하도록 지휘 감독했다는 엄청난 자백이 아닐 수 없다.윤석열도 위헌성을 알아챘는지 최후변론에서 부정선거론과 선관위 군 투입 지시에 대해 ‘매우 약해진’ 발언을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선관위 일부 점검 결과 심각한 보안 문제가 드러났기 때문에 전산시스템 스크린 차원에서 소규모 병력을 보낸 것”이라고 꼬리를 내린 것이다. 고작 시스템 점검을 위해 계엄을 때렸다고? 선관위 사무총장이 대학동기인데도?
● 공천개입 의혹의 김건희와 함께 복귀시킬 건가
‘가족회사’를 자처했다는 선관위의 특혜채용과 타락, ‘소쿠리 투표’ 같은 관리 부실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노태악 위원장이 5일 대국민사과문을 내고 “선관위 조직 운영에 대한 불신이 선거과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고 밝힌 것도 늦었지만 당연하다. 윤석열이 절대 임명하지 않았던 대통령실 특별감찰관 아닌 ‘특별감사관’이라도 설치해 선관위는 모든 의혹을 털고 거듭나야 할 것이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한 보수층 일각에선 부정선거론에 빠져들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취임 때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선서했던 대통령이 위헌적 계엄을 선포한 건 나라망신이다. 유수한 국제기구 EIU가 세계 2위로 평가한 선거과정을 못 믿고 선관위에 군을 투입해 대한민국을 ‘결함 있는 민주국가’로 추락시켰다. 서둘러 나라를 뒤엎어야 하는 ‘진짜 이유’를 감추려 부정선거를 끌어들인 게 아닌지 의문이다. 그런 윤석열을 공천 개입 의혹이 짙은 부인 김건희와 함께 제왕적 자리로 복귀시켜도 되는지, “이재명은 안 된다”는 접어놓고 따져볼 일이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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