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남편을 왕으로 만든 여자, ‘원경’과 김 여사

3 weeks ago 6

태종은 원경왕후 국정 관여 막았지만
윤 대통령은 부인의 개입 사실상 허용
계엄 전 군왕 같은 김건희 벌써 잊었나
탄핵 기각되면 ‘여사 권력’도 복귀할 것

드라마 ‘원경’이 지난주 막을 내렸다. 조선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가 주인공인데 tvN 홈페이지에 나온 태종 소개가 재미있다. “왕이 되는 과정에서 부인과 처가의 도움을 받았고 그로 인한 부채의식이 있다. 그러나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한 가문의 영광과 득세를 위해 왕이 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다.

드라마는 원경의 강인함과 뛰어난 정치 감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정안군(태종)이 안으로 들어가니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권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는 정종실록의 2차 왕자의 난 출정을 배우 차주영의 단호한 이마와 언어로 연출했다. 두렵다는 남편의 말에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늘 밤 역사는 분명 우리 편입니다” 하고 용기를 주는 식이다. 거사 뒤 태종이 피 묻은 칼을 씻으며 “왕의 자질은 나보다 그대가 타고난 게 아니었나” 토로했을 정도다.

‘원경’을 도입부에 끌어들인 이유는 간단하다. 태종은 왕비의 정치 개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백성이 주인인 새로운 조선’을 위해서다. 오만방자한 왕비의 네 동생을 처단한 것은 역사에 기록돼 있다. “권세가 있다 하여 백성 위에 군림하면 아니 될 것”이라는 왕 자신의 말을 지킨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손바닥에 왕(王) 자 쓰고 나와 대통령 되는 과정에서 정치 감각 유별난 부인 김건희 여사와 처가의 도움을 받았고 그로 인한 부채의식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윤 대통령이 왕비, 아니 대통령 부인의 국정 개입을 사실상 허용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12·3 비상계엄 전날 김 여사가 조태용 국가정보원장에게 문자를 보낸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조태용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기름 장어처럼 빠져나갔으나 대통령 부인은 공적 직위 없는 사인(私人)에 불과하다. 국정 개입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계엄 전날 정보기관 수장에게 문자를 보냈다니, 김 여사도 사전에 계엄을 알고 무슨 말을 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지난해 김 여사 문자 논란이 터졌을 때, 국민의힘 대표로 나선 한동훈은 “사적 경로로 김 여사와 문자를 주고받으면 민주당에서 국정농단이라 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국회에선 김 여사에게 비화폰이 지급됐느냐는 질문에 “확인해드릴 수 없다”는 경호처 차장의 답변이 나왔다. 국무위원도 아닌 민간인 김 여사에게 비화폰이 지급됐다면 광범위한 국정 개입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정치브로커 명태균 수사에서 비롯된 김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 수사는 대통령 부부의 서슬 앞에 꽉 막힌 상태다.

계엄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잠시 잊혀서 그렇지, 김 여사의 국정 개입은 대통령 지지층도 돌아버릴 정도였다. 김 여사가 마포대교 위를 시찰하는 장면은 ‘원경’의 대사를 빌리면 “군왕의 모습”이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황제 조사’는 물론이고 채 상병 관련 임성근 구명 로비 의혹 등 김 여사가 개입된 국사로 인해 나라는 하루도 편치 않았다.

조선에선 성리학을 채택해 왕비의 정치 관여를 금했다. 대한민국은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한 민주공화국이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 부인의 조언을 국정농단이라고 한다면 국어사전을 다시 써야 한다”고 했으나 국민은 김 여사의 국정 개입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하나가 비선의 국정농단이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사인의 국정 개입을 허용하고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임의로 재위임해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했으며 대통령으로서의 공익실현 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해 파면됐다. 윤 대통령이 아무리 죽고 못 사는 부인이라 해도 국민은 김 여사를 선출한 바 없다. 대통령이 김 여사에게 허락한 국정 개입은 국민이 용납 못 할 ‘권력의 사유화’요, 국민의 신임에 대한 배반이다.

계엄 실패 직후부터 윤 대통령에게는 ‘김건희 특검’을 막기 위해 계엄까지 한 남자라는 소리가 따라다닌다. 그는 “비상계엄 선포권 행사는 대통령의 통치행위”라며 사법심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입헌군주제에선 제왕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

“탄핵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통령 탄핵이 기각될 경우 윤 대통령만 복귀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 김 여사도 돌아온다. 대통령들은 ‘전시나 사변에 준하는 상태’라며 계엄을 선포할 수도 있고, 대통령 부인들은 세상 겁나는 것 없이 국정농단을 자행할지 모른다. “그래도 이재명은 안 된다”만 강조하다가 탄핵의 바다에서 익사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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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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