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AI 시대, 출연연의 역할을 다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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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ETRI 연구전문위원김형준 ETRI 연구전문위원

출연연의 역할은 지금 변곡점에 서 있다. 기술을 얼마나 더 잘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동시에, 축적된 성과를 국가 전략과 현장에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기술의 속도가 경쟁을 좌우한다면, 기준과 연결은 그 경쟁의 질서를 만든다.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낯선 기술이 아니다. 오랜 연구와 산업 현장의 축적 속에서 이미 중요한 기반 기술로 자리 잡았다. 달라진 것은 영향력의 범위다. 데이터를 어떻게 축적하고 관리하며, 어떤 기준으로 검증하느냐에 따라 연구의 설득력과 확장성이 달라진다. 성능 경쟁 못지않게 데이터의 품질과 재현성, 그리고 신뢰 체계가 중요해졌다. 국제 표준 논의의 현장에서 확인하는 것도 결국 기준의 힘이다. 공공 데이터 기반과 검증 체계를 다져온 출연연의 역할은 이런 변화 속에서 더욱 의미를 갖는다.

감염병과 재난 대응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평소에 축적된 연구 인프라와 경험이 위기 상황에서 실제 성과로 이어질 때 연구의 가치가 드러난다. AI·양자·6G·저궤도 위성과 같은 전략기술 역시 개별 성과의 축적을 넘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경쟁력을 갖는다. 기술 개발과 실증, 정책 연계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야 한다.

운영 체계 또한 시대 변화에 맞게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연구 관리가 데이터 중심으로 정비되고 보다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면 연구자는 연구 자체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 절차의 정비와 관리 체계의 정교화는 현장의 몰입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변화는 일시에 완성되기보다, 현장의 경험을 반영하며 차분히 축적될 때 지속성을 갖는다.

조직 문화 역시 중요한 요소다. 주니어 연구자의 도전과 시니어 연구자의 경험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자산이다. 세대 간 협력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동의 임무 아래 함께 일하는 과정 속에서 신뢰로 쌓인다. 최근 시도되는 일부 출연연의 '미션 기반 팀 운영'이나 '세대 통합형 프로젝트'는 이러한 방향의 실험이다.

기술 경쟁은 이미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국제표준 활동과 공동연구는 전략기술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기반이다. 연구 성과가 국제 기준과 연결될 때 그 파급력은 배가된다. 출연연은 이러한 연결을 이어가며 공공 기술 기반을 주도해 온 기관이다. 특히, AI안전성, 6G주파수 표준, 양자통신 프로토콜 등 전략기술 분야에서 출연연의 국제 기여도는 우리 산업의 글로벌 입지와 직결된다.

최근 정부의 연구개발(R&D) 혁신 논의는 방향이 분명하다. PBS 단계적 폐지와 연구 자율성 확대는 연구 현장의 여건을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자율성 확대와 전략적 자원 배분이 조화를 이루는 운영 체계 또한 중요하다. 출연연 스스로 국가 R&D 방향과의 정합성을 유지하면서도 창의적 도전을 장려하는 내부 거버넌스 노력도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출연연의 조직 운영과 조직 문화 또한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지금은 축적된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려 전략기술의 기반을 다지고 세대와 분야를 잇는 협력 구조를 확장해야 할 시점이다. 그렇게 할 때 출연연의 역할도 더욱 또렷해질 것이다.

김형준 ETRI 연구전문위원 khj@etr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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