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예의 이심전심] 나쁜 어른은 있어도 나쁜 아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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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예의 이심전심] 나쁜 어른은 있어도 나쁜 아기는 없다

조심스레 고백한다. 이렇게 나이 들어 한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질 줄 몰랐다. 그저 바라만 봐도 박하사탕을 문 듯 가슴속에서부터 저절로 미소가 나오는 사랑. 그의 순수함이 메마르고 찌든 내 영혼과 육신을 적신다. 그는 갓 두 돌 된 내 외손자다.

말 못 하는 돌 전의 아기와도 교감을 느끼는 건 까꿍 놀이를 통해서다. 아기는 커튼 속에 숨었다가 또는 눈을 가렸다가 “까꿍!” 하며 나타나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청아한 웃음을 터트린다. 엄마가 나타나지 않아도 울지 않는다. 잔뜩 기대를 품고 검은 구슬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엄마를 기다린다. “까꿍!” 신호로 엄마가 다시 나타나면 세상없이 행복해한다. 보이지 않더라도 엄마가 늘 자기 곁에 있는 존재라는 무한 신뢰를 배우게 된다.

돌배기는 장난감을 갖고 놀다 안 보이면 작은 입을 벌리며 “까꿍!” “까꿍!” 주문을 외우며 찾는다. 엄마가 늘 “까꿍!” 하며 나타났기에. 언제부터인가 외손자가 내게 장난을 건다. 장난감이나 과자를 슬쩍 자기 등 뒤나 바구니에 갖다 놓고 “어디 갔지?” “어디 있지?” 찾는다. 나도 못 본 척 안 본 척하며 “어디 갔지?” 하고 찾는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제 눈을 가리며 찾는 척하다 그 애는 어느 순간 “까꿍!” 하며 장난감을 찾아내 으쓱대며 내게 전리품처럼 보여준다. 그 모습이 귀여워 몇 번이고 껴안고 뽀뽀한다.

30년 전 아들이 아기였을 때 생각도 자주 난다. 프랑스에서 낳은 아들을 국립 어린이집에 보냈다. 프랑스어로 말문을 뗀 아이가 의자나 곰돌이 앞을 지날 때나 자동차를 굴리다 다른 장난감을 칠 때도 “빠르동!”이라고 연발하는 게 아닌가. “빠르동”은 ‘실례합니다’ ‘미안합니다’의 의미인데, 인간에게 하는 말이지만, 아들의 눈에는 그 물건들이 인격적으로 대해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그 감동은 신선하고도 신성했다.

그 무렵 우연히 프랑스 주간지의 특집 기사를 봤다. 유명한 연쇄 살인마, 흉악범 같은 희대의 범죄자들을 다루며 그들의 현재 얼굴과 영유아 시절의 사진을 게재한 것이었다. 그들 역시 인형처럼 천사처럼 귀여운 서양 아기들 모습이란 점에 매우 낯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아기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나쁜 어른은 있어도 나쁜 아기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선악의 기원>의 저자 진화심리학자 폴 블룸은 실험을 통해 아기들은 도덕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9개월 된 아기에게 언덕을 올라가는 캐릭터를 밀어서 도와주는 캐릭터와 떨어트려서 방해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단막극을 보여준다. 이 실험에서 아기들은 도와주는 캐릭터에게 선호를 보였다고 한다. 12개월 된 아기들에게 인형극을 보여준 실험에서는 주인공 인형이 공을 굴렸을 때 공을 되돌려준 인형보다 공을 들고 달아난 못된 인형을 아기들이 후려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아기들은 신뢰와 공감과 사랑과 도덕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아기들이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까. 손자를 보며 염려한다.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는 어른이 되어가며 이기적 생존본능으로 점점 잔인해질까. 지금의 어지러운 세상은 또 어떤가. 끼리끼리의 지나친 공감은 배타적인 혐오와 보복을 부추기며 선악이 구분되지 않은 선택적인 도덕성에 매몰돼 있지 않나.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우리 어른들의 기원을 따지자면, 모두 ‘도덕적인’ 아기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함민복의 시 ‘성선설’ 전문을 보면 하물며 태어나기 전부터도 이렇게 착한 씨앗이었거늘.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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