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총성 없는 경제전쟁 중이다. 관세, 기술, 데이터 주권을 둘러싸고 각국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고 있다. 자유무역의 원칙은 무너졌고 각국은 앞다퉈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해 보호장벽을 쌓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충돌은 격화하고 그 사이에 낀 한국 경제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우리의 위기는 구조적이다. 국방은 미국에, 무역은 중국·미국에 의존하는 한국은 글로벌 충돌의 직격탄을 맞았다. 반도체, 조선, 배터리 등 주력 산업은 경쟁이 심화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저출생, 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내수 시장 성장마저 가로막는다. 더 이상 예전 방식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자칫하다가는 ‘신(新)사대주의 국가’로 살아가야 할 판이다.
산업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 단순 제조에서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 가장 확실한 대안이 ‘의료’다. 수십 년간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발전시킨 기술과 노하우가 있다. 의료를 복지 영역에만 가둘 때가 아니다. 지금 한국 의료는 세계가 주목하는 산업이자 국가 브랜드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환자는 117만 명으로 전년보다 93% 증가했다. 누적 외국인 환자는 16년간 505만 명을 넘어섰다. 의료관광으로 발생한 연간 경제효과는 수조원에 달한다. 한국 의료의 품질과 효율성, 빠른 진단과 치료는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국 의료는 가성비가 탁월하다. 미국에서 평균 2억원 넘게 드는 심장판막 수술이 한국에서는 3000만~4000만원이면 가능하다. 위암 5년 생존율은 한국이 78%, 미국은 33%다. 치료 성과 면에서 한국이 압도적이다. 전 국민 건강보험 덕분에 축적된 의료 데이터는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의 핵심 인프라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한국 의료 시스템은 지금 붕괴 직전이다. 낮은 진료 수가, 과도한 노동, 고위험 진료과 기피 현상 등…. 지난해 의료대란은 이 모든 위기가 한꺼번에 폭발한 결과였다. 이대로라면 의료는 공공서비스로서도, 산업으로서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제는 틀을 바꿔야 한다.
첫째, 의료를 전략산업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외국인 환자 유치를 국가 전략으로 삼고, 병원이 자율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외국인 환자는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고도 병원에 2~3배 수익을 안겨준다. 이는 의료인력 확충과 서비스 질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외국인 전용 병동, 비자 간소화, 다국어 지원 확대 같은 실질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
둘째, 한국 병원을 수출해야 한다. 중동 동남아시아처럼 고소득 국가임에도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곳부터 공략해야 한다. 아랍에미리트(UAE) 등과 의료협력을 제도화하고 ‘한국형 병원’을 세우는 방식이다. 이는 외교, 안보, 경제를 동시에 강화하는 의료 외교 전략이다.
한국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섰다. 반도체 이후 우리는 무엇을 내세울 것인가. 의료다. 세계가 필요로 하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산업. 늦기 전에 이 전략카드를 꺼내야 한다. 공공의료 논쟁에 몰두하다가 나라가 망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