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서울의 한 장례식장에서 본보 기자와 만난 김모 씨의 말이다. 사람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빈소의 주인은 그의 딸인 10대 김모 양. 김 씨는 이틀 전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자신의 집(다세대주택)에서 밤새 벌어진 화재로 딸을 잃었다. 아내와 아들은 화마에 중상을 입었다. 김 씨는 “와이프가 다친 걸 보니 애를 구하려고 한 거같이 손과 얼굴에 다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불이 나던 밤 김 씨가 집에 없었던 건 가난 때문이었다. 이들 가정은 차상위계층이었고, 딸은 자폐 스펙트럼을 앓고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을 앓는 아이는 부모 중 한 명이 하루종일 옆에서 돌봐줘야 한다. 김 씨의 아내가 일을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네 식구의 생계를 짊어진 김 씨는 야간 근무를 하는 직장에 다녔다. 주간 근무보다 돈을 더 많이 줘서다. 그날 김 씨는 야간 근무를 하기 위해 집을 비운 상태였다.
국가가 이 가족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중증장애인이었던 김 양 앞으로 매달 17만 원의 돈이 나왔다. 또 구청에서 쌀과 같은 생필품을 지원해줬다고 한다. 하루 13시간의 밤샘 노동을 하는 김 씨가 기억하는 국가가 그들에게 보여준 관심은 거기까지였다.기초생활수급자면 매달 최대 195만 원의 생계급여가 나오지만 차상위계층인 이들에겐 생계급여는 나오지 않았다. 월 최대 50만 원인 주거급여 역시 해당되지 않았다. 이들이 녹번동에 자가주택이 있다는 이유였다. 녹번동 일대에서 김 씨 소유 자가주택과 비슷한 평수의 빌라 매매 가격은 2억 원 안팎이다. 딸의 목숨을 앗아간 그 집은 딸의 장애 때문에 정착을 해야 돼 빚을 내 무리해서 산 것이었다.
자폐 스펙트럼 같은 발달장애 가정의 빈곤 문제는 통계로도 나타난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내놓은 ‘2023년 발달장애인 일과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발달장애인이 있는 가정의 월평균 소득은 275만1000원이었다. 같은 해 통계청 기준으로 한국의 가구당 월평균 소득 502만4000원의 약 54%에 불과하다. 맞벌이가 평균인 요즘 부모 한쪽이 일을 못 하는 현실이 통계에 적나라하게 반영됐다. 이런 빈곤의 늪은 발달장애인 가정 40.1%를 기초수급대상자로 만들었다.
물론 김 씨 가족 같은 이들에게 무작정 큰 금액을 지원을 하자는 건 아니다. 김 씨 가족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복지제도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50만 원을, 농민이라는 이름으로는 60만 원을 주는 나라에서 이들 가족에게 줬던 돈이 매달 17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지금의 복지 제도가 정의롭다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행히 본보 보도(2025년 2월 22일자 A8면 참조)를 접한 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실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일부개정법률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을 위한 소득과 재산을 따질 때 중증장애인이 있는 저소득 가정은 자가주택이 있더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이다. 많이 늦었지만 정치권의 더 큰 관심을 기대한다.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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