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미지]제이미가 가득한 사회에 ‘영재적 모먼트’는 없다

1 week ago 3

이미지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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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제이미가 까까 세는 걸 본 엄마 이소담 씨는 “이건 영재적인 모먼트”라는 생각에 수학학원을 등록한다. 영어학원 원어민 강사로부터 제이미가 배변 훈련에 성공했단 전화를 받고, 소담 씨는 기쁜 마음으로 배변 훈련 과외를 취소한다. 이렇게 ‘과외 하나를 세이브’한 소담 씨는 제기차기 과외를 알아보러 나선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2’에 나온 제기차기가 언제 학교 수행평가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달 SNS에 공개돼 1, 2탄 합쳐 조회수 1000만 회를 넘긴 개그우먼 이수지의 일명 ‘(고슴)도치맘’ 영상 내용이다. 강남 엄마로 대표되는 부모들의 과한 조기교육을 풍자한 이 영상은 몇 주째 화제를 이끌며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부모들을 지나치게 희화화한 측면도 있지만 주변에서 접하는 사례들을 보면 영상 내용을 결코 과하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지인은 세종시 사는 공무원인데 아이만 서울인 친정집에서 키운다. 서울 유명 영어유치원(영유아 영어 사교육 기관)에 보내기 위해서다. 좋은 학원에 들어가려고 네댓 살 아이에게 ‘레테(레벨테스트)’ 준비를 시킨다는 지인도 여럿이다. 이른바 ‘4세 고시’다.

아이의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키우기 위한 조기교육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현 한국의 조기교육이 아이의 재능과 무관하게 입시, 혹은 특정 직업군을 위한 ‘조기학습’에 치우쳤다는 데 있다. 아이를 영어 학자나 영어 소설가로 키우기 위해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학부모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 일찍 배워둔 영어가 입시나 취업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지난해 의대 증원 소식에 학원가에 수많은 선행학습반이 생긴 것도 같은 이치다.

특정 대학, 직업군에 쏠린 조기학습은 정작 인재가 필요한 미래 동력 산업의 인재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입시용 암기, 주입식 교육에 단련된 아이들이 도전 정신, 창의성 등을 요하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젠슨 황 등 혁신을 이끈 세계적 기업가 중 조기교육으로 정해진 길을 걸어 성공한 사람은 없다. 최근 돌풍을 일으킨 중국 생성형 AI 딥시크의 젊은 직원들도 각자가 원하는 공부에 심취해 스스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 연구자들이었다.

그러나 부모들만 탓할 수 있을까. 내 아이가 마크 저커버그나 뤄푸리(딥시크 개발자)가 된다는 데 말릴 부모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서 저커버그나 뤄푸리가 나오기 어렵다는 데 있다. 학교 평가 시스템은 이런 학생들을 제대로 평가해 내지 못하고 대학입시는 개혁을 외친 지 십수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창업 실패는 개인 파산으로 이어져 재기가 어렵기 일쑤고, ‘타다’ 실패에서 보듯이 사회와 정치가 혁신을 저해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을 겪거나 눈으로 봐온 부모들은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제2의 이소담 씨가 돼 아이를 안정적인 전문직, 명문대로 가는 기차에 일찍 태우는 것이다. 과한 조기교육을 두고 부모들 탓만 하기 어려운 이유다. 확실한 건 4세 고시 제이미들이 가득한 사회에 ‘영재적 모먼트’는 오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패러디 영상을 보며 ‘강남 엄마들이 문제’라고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왜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고민하는 정부 당국자들이 있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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