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국은 AI에 빠져들었다. ‘세기의 대국’이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열린 것이 우리 과학기술 발전에 축복이 될 것이란 여론이 많았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알파고 대국 기간 중 삼성전자와 LG전자 연구센터를 찾아 한국의 AI 연구 상황을 점검했다. 우리가 AI 중심 국가로 떠오를 것이란 기대도 컸다. 한국 AI 수준이 미국에 2년 뒤지지만 중국에 0.3년 앞서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9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의 AI, 더 나아가 정보기술(IT)로 포괄되는 첨단 산업의 현주소는 어떨까. 지난해 미국 오픈 AI의 챗GPT, 올해 중국 딥시크 등 연이어 발표되는 생성형 AI 경쟁에 한국 기업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동아일보 취재진이 2016년 알파고 쇼크 이후 9년간 한국과 미국의 상위 10개 IT 기업의 시가총액을 조사한 결과 미국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462.5% 오르는 동안 한국은 33.8% 성장하는 데 그쳤다. 이 기간 AI칩의 선두주자 엔비디아, 콘텐츠 구독 시장을 연 넷플릭스, 클라우드 컴퓨팅 기업 세일즈포스 등 3곳이 새로 미국의 10대 IT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에선 게임 ‘배틀그라운드’로 유명한 크래프톤만 유일하게 새로운 10대 기업이 됐다. 성장과 혁신 모두 한국이 미국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앞으로가 더 큰 문제일 것이다. 주요국이 선점한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의 범용 AI 개발은 크게 뒤처졌다. 후발 주자가 수천억 원에 이르는 개발 비용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 한국의 젊은 AI 인재들이 미국 실리콘밸리로 떠나는 상황에서 우리의 IT 인력 수준 역시 담보하기 쉽지 않다. 미국에서 창업한 한 스타트업 기업 대표는 “생성형 AI가 유행한다고 해서 지금 뛰어들어 봐야 시작부터 10년 격차가 나는 것”이라며 “한국만의 강점을 혁신산업에 덧칠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계에서는 AI 같은 혁신산업도 틈새시장을 노리는 ‘니치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미국, 중국이 잘하는 범용 AI 개발 대신 한국이 강점을 가진 전자, 조선, 철강 등 기존 제조업 현장에 특화된 AI 개발부터 시작해 보자는 것이다. 로봇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경쟁력을 지닌 업종을 중심으로 생산 혁신에 필요한 로봇부터 만든다면 주요 2개국(G2) 사이를 파고들 여지가 생긴다. 한국만큼 산업현장 특화 AI나 로봇이 ‘현장 경험’을 압축적으로 쌓을 수 있는 나라도 없다.
그런 방식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게 한국의 방산 기업들이다. 미국과 러시아란 양대 무기 생산국 사이에서 자주포 등 상대적인 틈새 상품을 주력으로 내놓았다. 가격 경쟁력과 기술 이전 약속을 해 준 것도 한국산 무기 수입국들에는 ‘플러스 알파’ 효과를 냈다. 지난해 국내 4대 방산 기업의 영업이익 합계가 2조6000억 원을 넘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재점검해 봐야 할 시점이다.
박재명 산업1부 차장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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