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위협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1980년대 미국 주도의 반도체 시장에서 서서히 성장한 일본 반도체는 1985년을 기점으로 미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자국 반도체산업협회의 청원을 빌미로 대대적인 덤핑 조사에 착수했다. 1986년 굴욕적인 ‘미일 반도체협정’이 체결됐고, 수출 제한과 관세 압박이 이어지며 일본 반도체는 서서히 쇠락했다. 그 틈을 비집고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신흥 반도체 기술국으로 떠오른 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다시 2025년의 트럼프로 돌아오자.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칼을 휘두르고 있지만 역시 한국에 가장 위협적인 건 반도체다. 그 사이 대미 수출 의존도 커졌다. 한국의 전체 반도체 수출에서 미국과 대만(TSMC를 경유해 미국으로 수출) 비중이 2020년 13.9%에서 지난해(1∼11월) 21.7%로 올라섰다. 반면 중국으로 가는 비중은 40.2%에서 33.3%로 떨어졌다.
기존 수출 창구였던 중국은 앞으로도 더욱 문이 닫힐 것이다. 트럼프는 자국 첨단 기업의 중국 수출도 막았고, 더 나아가 중국과 거래 관계가 있는 기업들에 대한 투자까지 촘촘히 심사하겠다고 하는 판이다. 무엇보다 중국 반도체의 자력 굴기가 심상치 않다.39년 전 일본과 지금 우리가 다른 건 하나다. 1986년 당시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는 일본 반도체를 잡아 달라고 정부에 청원을 넣었다. 지금 미국 반도체 업계는 “우리까지 다 죽는다”며 제재를 비토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글로벌 공급망에 촘촘히 얽혀 있고, 엔비디아에 필수적이고 애플에 필수적인, 대체 불가능한 HBM과 D램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시작한 각자도생 뉴노멀은 유럽을 거쳐 아시아태평양까지 뻗어올 것이다. 당장 독일에서도 우파가 재집권하고 극우정당이 제2정당에 올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의 굴욕을 보고 유럽조차 가슴이 서늘하다. 위로 북한과, 더 위로 중국과 맞대 있으면서 오직 한미 동맹과 기술력에 기대어 왔던 한국이야말로 주어만 바꾸면 똑같은 상황이 되기 십상이다.
기업의 트럼프 대응을 자문하는 한 로펌 관계자는 “틱톡의 사례처럼, 결국 미국에서 미국의 방식으로 트럼프에게 대체 불가능하고 협상 불가능한 존재가 돼야 한다”고 했다. 지금 트럼프가 짜 놓은 판에 들어가는 걸 피할 수 없다면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카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기업들이 목 놓아 “전 세계에서 우리만 이럴 수 없다”고 호소하는 상법개정안, 반도체특별법조차 여론 따라 간을 보며 우회전했다 좌회전했다 할 때가 아니다. 이제 트럼프와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등 우리의 무기를 갈고닦는 데 국론을 모아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강소국의 생존법은 늘 같다.곽도영 산업1부 기자 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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