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왕묘에 제사 올렸던 경칩… 명의 ‘조선 패싱’과 선조의 의지[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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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동관왕묘(보물 제142호)에 있는 금동제 관우신상. 사진 출처 국가유산청

서울 종로구 동관왕묘(보물 제142호)에 있는 금동제 관우신상. 사진 출처 국가유산청

이문영 역사작가

이문영 역사작가
3월 5일은 24절기 중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다. 이날에 조선에서는 관왕묘에 제사를 올렸다. 가을이 되면 상강 때 또 제사를 올렸다.

관왕묘는 조선 여러 곳에 세워졌는데, 남관왕묘는 명나라 유격장 진인(陳寅)이 1598년에 세웠다. 전쟁 중에 관우가 나타나 승리를 이끌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평양성 전투, 한산대첩 등에 관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1599년 명나라 만력제는 관왕묘를 하나 더 지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동관왕묘(동묘)가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은 2년에 걸쳐 관왕묘를 간신히 지을 수 있었다.

관우는 명나라에 들어와서 신격화됐다. 명 홍무제는 관우를 무안왕(武安王)에 봉하고 남경에 관우사묘를 세웠다. 명나라 가정제 때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관우가 나타나 도와줬다는 이야기가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자 만력제는 관우를 ‘협천대제’, 즉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할 정도가 됐다. 명나라 군대에 전해지는 이런 관우 신앙이 조선에도 전해져 관왕묘가 세워진 것이다. 도성 부근 두 곳의 관왕묘뿐 아니라 고금도, 안동, 성주, 남원에도 관왕묘가 세워졌다. 모두 명나라 장수들이 세웠다.

경략조선군무사(經略朝鮮軍務使) 양호(楊鎬)는 선조에게 관우의 생일인 5월 13일에 관왕묘에 와서 예를 올리라고 강요했다. 어쩔 수 없이 선조가 방문해 분향하고 재배를 올렸다. 신하들은 모두 분개했지만 약소국으로 대국의 원군을 받았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는 조선을 패싱하고 일본과 다이렉트로 강화 교섭에 나섰다. 선조는 분개했다. “적을 쳐서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천지간에 설 수가 없다”며 눈물을 흘렸지만 명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송응창은 명나라 군사의 목숨으로 연명하면서 주제도 모르고 설친다고 비난했다. 이때 왕자들도 일본에 잡혀 있던 상태라 선조는 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냐고 항의했지만 명 측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일축해 버렸다. 하지만 일본은 협상 중에도 진주성을 공격하고 대학살을 저질렀다.

오늘날 미국이 자신의 종전 구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모습은 임진왜란 때의 명나라와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의 국민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명이 주도하던 협상은 일본의 거부로 결국 파국에 이르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을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의 4개 도를 할양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내걸었다. 도요토미는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터무니없는 뒤집어씌우기에 나섰는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전쟁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판박이다.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북한이 6·25전쟁을 일으킨 것처럼 명백한 사실이다.

선조는 명나라 장수가 오라고 한 관왕묘 참배를 묵묵히 감내했다. 이후에 그들의 요청대로 관왕묘에 연년이 제사를 올리게도 했다. 하지만 조선을 분할해 일본에 내주고 전쟁을 마무리하자는 것에는 결연히 반대했다. 명나라의 참전이 조선을 구했지만 그렇다고 명나라에 모든 것을 다 맡기진 않았다. 관왕묘 제사는 1908년 중지됐다.

이문영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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