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삶은 그 노인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이 노인 돌봄에 신경을 써야 하고 사회와 국가도 직간접적인 비용을 부담하게 됩니다. 초고령사회 진입 초기이니 앞으로 우리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속속 겪게 될 겁니다. 부담을 덜 수 있는 국가 정책이나 요양 서비스가 있어도 초고령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노인과 가족이 알아서 해야 할 부분이 대부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노화와 노쇠는 구분해야 합니다. 노화는 속도를 늦추려고 노력하면서 현명하게 적응해야 할 과정이지만, 노쇠가 일단 일어나면 몸이든 마음이든 점점 심해집니다. 가족이나 남의 도움을 받아야 생존이 가능한 단계로 추락하면 삶의 뿌리가 흔들립니다. 현대 의료의 눈부신 발전과 복지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노쇠 과정은 개인과 가족의 고통스러운 헤어짐으로 끝납니다. 의료 기술과 장비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과거의 불치병 중 상당 부분이 현재 치료가 가능한 질병으로 모습이 달라졌으나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과 실제 개인이 시간, 돈을 들여서 할 수 있는 것의 차이는 여전히 큽니다. 과학과 기술에 기반을 두는 현대 의료에서 ‘아픈 사람’인 환자가 검사 보고서에 담긴 숫자가 아닌, 사람 자체로 대접받을 수 있는 여지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증상과 검사 소견 그리고 진단명이 아픈 사람의 이름과 정체성을 대신합니다. 의료 자체도 세부 영역으로 계속 전문화되고 있어서 해당 전문의사의 입장에서 자신의 환자를 사람 전체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고, 현대 의료의 효과와 효율성을 고려하면 불평하기도 어렵습니다.
현대 의료의 수준은 세계적이지만 고령의 가족이 초고령 노인을 보살피는 책임을 직접 몸, 마음으로 져야 하는, 노쇠로 인한 흔한 문제들을 돌볼 전문 시스템의 이용이 쉽지 않은 상황은 환자와 가족의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경험해 보시면 압니다. 현대 의료가 숫자 중심 의료여야만 한다고 해도 요양 의료는 사람 중심이어야 합니다. 목표가 뚜렷하게 달라야 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진지하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한 목표를 가까운 미래에 이룰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현대 의료의 과학과 요양 의료의 인간 존중이 균형을 이루게 돼야 대한민국이 초고령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를 성취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겁니다.지금 대한민국 의료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숫자에만 집착했던 정책 집행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대학병원급 의료의 실제 상황을 직접 경험해 보시면 동의하실 겁니다.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는 소망으로 얼룩진 정책 추진의 결과는 불특정 다수가 지금 받는, 앞으로 받을 고통입니다. 숫자에 집착해서 사람을 놓친 겁니다.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노화가 반드시 노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노쇠하다고 오래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화, 노쇠의 경험은 개인차가 큽니다. 노력하면 늦출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가속도가 붙어서 나빠집니다. 삶의 근본이 흔들립니다. ‘저속 노화’는 물론이고 노쇠 부분의 관리와 개선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포기는 적응의 최대 장애물입니다. 느리지만 꾸준히, 약하지만 조금이라도 한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한술 밥에 배부르냐고 하지만, 한술 밥에도 한술만큼 배부릅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든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좌절하고 포기는 빨라집니다. 내가 나를 도와야 합니다. 내 노화는 내가 통제해야 하고 내 노쇠는 내가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스스로 의지가 부족하면 가족도, 사회도, 국가도 제대로 돕기 어렵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의료는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초고령화로 인한 의료 문제까지 수용하기에 힘이 모자랍니다. 약간의 치료와 오랜 기간 돌봄을 받을 여유가 확 줄었습니다. 오늘도 ‘그림의 떡’ 사이를 헤매면서 환자와 보호자는 힘들어하고 지쳐갑니다. 미리 각자가 알아서, 여유를 두고 살아갈 방법을 꾀해야 합니다. 미래를 예측하고 현실을 파악하고 똑바로 보면서 마음을 굳혀서 실천해야 합니다.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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