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수 한국생산성본부 환경·에너지컨설팅센터장2026년 글로벌 시장의 경쟁 질서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과거 기업 경쟁력은 성능과 가격, 디자인 중심으로 평가됐지만 이제는 제품이 얼마나 투명하고 신뢰 가능한 데이터를 담고 있는지가 핵심 기준이 되고 있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 기업 지속가능성의 핵심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데이터 투명성은 시장 생존의 조건이 되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디지털제품여권(DPP)이 있다. DPP는 제품의 원재료 조달부터 생산·유통·사용·재활용까지 전 생애주기 정보를 디지털 방식으로 기록·관리하는 '제품 신분증'이다. 유럽연합(EU) 에코디자인 규정(ESPR)을 기반으로 추진되는 DPP는 단순한 환경 규제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전체를 ESG 기준에 맞춰 재편하려는 핵심 제도로 떠오르고 있다.
DPP는 이미 시행 단계에 들어섰다. EU는 올해 산업용·전기차 배터리를 시작으로, 내년에는 철강·알루미늄·섬유·전자제품 등 탄소 집약산업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또 포장재 규정(PPWR)은 제품 포장재의 재활용 정보를 QR 방식으로 제공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EU는 2030년까지 대부분의 제품에 DPP 적용을 의무화할 예정이다.
이는 단순한 환경 인증 강화가 아니다. 앞으로 EU 시장에서는 ESG 데이터를 디지털 방식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시장 진입 자체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제품 경쟁력은 제조 기술뿐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체계적이고 신뢰성 있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게 됐다.
DPP의 핵심은 제품의 '전 생애주기 데이터'다. 생산 과정의 탄소발자국, 원재료 출처와 공급망 이력, 재생원료 사용 비율, 유해물질 포함 여부 등이 기록된다. 또 제품의 수리 가능성, 에너지 효율, 사용 수명, 재활용 가능 여부까지 포함된다.
예를 들어 배터리는 리튬과 코발트의 채굴 국가와 생산 과정의 탄소배출량, 재활용률까지 데이터로 관리된다. 소비자와 규제 당국은 QR코드 등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결국 DPP는 ESG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데이터로 입증하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많은 기업들이 아직 이를 단순한 환경 규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준비가 늦어질 경우 공급망 탈락과 그린워싱 리스크에 직면할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협력사에 탄소발자국과 원료 추적성 등 ESG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으며, 자동차·배터리 산업에서는 하위 협력사까지 포함한 공급망 데이터 검증 체계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반면 글로벌 선진 기업들은 DPP를 새로운 성장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BMW와 폭스바겐, 지멘스 등이 참여한 '카테나-X(Catena-X)'는 산업 전체의 데이터 교환 표준 구축에 나서고 있으며, 명품 업계는 블록체인 기반 제품 이력 관리로 정품 인증과 수리 이력을 제공해 브랜드 신뢰를 높이고 있다. 미래 시장은 제품을 많이 만드는 기업보다 데이터를 표준화하는 기업이 주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현재 국내 기업들의 DPP 대응은 일부 배터리 산업을 제외하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특히 중소·중견 협력사의 데이터 대응 역량은 부족한 상황이다. 단순히 대기업이 협력사에 데이터를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산업별 데이터 연합과 공급망 전체가 참여하는 디지털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DPP를 단순 규제가 아니라 '데이터 자산화 전략'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기업 내부에 분산된 데이터를 통합하고 공급망 데이터 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국제 표준과 연동 가능한 플랫폼을 마련해 글로벌 시장과의 상호운용성을 확보해야 한다.
디지털 제품 여권은 일시적 규제가 아니다. ESG 시대의 새로운 산업 질서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새로운 기준이다. 이제 제품은 공장을 떠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데이터와 함께 시장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지속가능성과 신뢰를 증명해야 한다. 데이터가 곧 기업의 신뢰이고 ESG 경쟁력이 시장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김택수 한국생산성본부 환경·에너지컨설팅센터장 tskim@kp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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